미국에서 20년 넘게 생활하며 다양한 브랜드의 글로벌 사업을 경험한 안재석 라인프렌즈 아메리카 부사장(VP)이 K콘텐츠의 미국 시장 공략법으로 팬덤에 대한 이해와 진정성 있는 소통을 꼽았다. 콘텐츠의 완성도만으로는 글로벌 시장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팬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파악하고, 그들의 관심과 감정에 맞춰 관계를 만들어가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안 부사장은 6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빌트모어호텔에서 열린 ‘U-KNOCK 2026 in USA’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방탄소년단(BTS)은 데뷔 초기부터 해외 팬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했다”며 “팬들이 왜 BTS를 좋아하는지 이해하고 그들과 가까워지려는 노력이 글로벌 팬덤을 만든 출발점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다른 그룹들도 춤과 노래, 실력이 뛰어나고 매력적이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팬들이 왜 특정 아티스트를 좋아하는지 들여다보는 것”이라며 “그 이유를 이해해야 비즈니스의 실마리도 찾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미국에서 20년 넘게 생활하며 화장품과 캐릭터 지식재산(IP), K팝 등 다양한 분야의 사업을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체득한 것은 한국에서 통하는 성공 방정식이 미국에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현지 소비자의 취향과 시장 구조를 이해하고, 브랜드가 가진 매력을 미국 관객의 눈높이에서 다시 설명해야 한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팬을 고객이 아닌 브랜드의 동반자로
라인프렌즈의 캐릭터 사업 역시 팬덤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K팝 아티스트가 직접 디자인한 캐릭터를 상품으로 만드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가 탄생한 배경과 스토리를 팬들에게 전달하고 이를 통해 아티스트와 팬 사이의 연결고리를 확장하는 방식이다. 안 부사장은 “미국에서는 코어 팬뿐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팬들까지 이해하고 확장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며 “캐릭터를 단순히 인형으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왜 만들어졌고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꾸준히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시장에서 하나의 캐릭터가 자리 잡기까지는 최소 2년 정도의 지속적인 소통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이를 위해 사업을 시작하기 전 팬들을 직접 만나는 과정도 거친다. 팬들에게 아티스트나 캐릭터를 왜 좋아하는지, 어떤 점에 끌리는지 묻고 때로는 2~3시간씩 이야기를 듣는다. 팬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캐릭터 디자인과 사업 방향에 반영된다. 그는 “팬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줬다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렇게 관계를 맺으면 팬들은 단순한 소비자를 넘어 브랜드를 알리고 함께 성장시키는 앰배서더가 된다”고 강조했다.
안 부사장은 에이티즈(ATEEZ)가 미국 시장에서 성장할 가능성을 일찍부터 주목했다고 떠올렸다. 특히 미국 팬덤의 성격과 음악적 취향을 살펴보고 다른 아티스트와의 협업 등을 통해 새로운 팬들과 만날 접점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한국에서의 인기만으로 해외 시장의 가능성을 판단하기보다 현지 팬들이 어떤 문화적 배경과 취향을 갖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에이티즈의 성장 과정에서도 팬덤의 취향을 읽는 전략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안 부사장은 BTS가 데뷔 초기 인터넷을 통해 해외 팬들과 꾸준히 소통하고 친밀감과 진정성을 쌓았던 것처럼 에이티즈 역시 팬들과의 접점을 넓혀갔다고 설명했다. 다만 에이티즈에는 또 다른 팬덤 유입 경로가 있었다. 초기 팬덤 가운데 일본 음악과 록 문화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있었고, 에이티즈가 일본 아티스트와 협업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는 것이다. 안 부사장은 “에이티즈가 일본 아티스트 비퍼스트(BE) 등과 협업하면서 일본 음악 팬들의 레이더에 포착됐다”며 “그렇게 형성된 팬덤이 미국 시장에서도 중요한 접점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LA에만 약 250명의 핵심 팬이 있다고 전했다. 이들을 단순한 고객이 아닌 브랜드의 성장을 이끄는 ‘슈퍼팬’으로 대우한다. 매장을 방문하는 핵심 팬들에게는 일반 고객보다 30분 먼저 문을 열어주고, 이들이 매장을 찾을 때마다 이름을 기억하고 인사를 건네며 관계를 이어간다는 것이다. 그는 “데이터만으로는 팬덤의 마음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며 “현장에서 팬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충성도 높은 팬을 존중하고 챙기는 일이 결국 브랜드에 대한 신뢰와 구매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과 다르다”…23년 현지 경험의 교훈
안 부사장이 미국에서 생활하며 확인한 또 다른 사실은 현지 시장에 대한 섣부른 낙관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K콘텐츠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해서 미국 대중 전체가 한국 콘텐츠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미국에서도 BTS를 모르는 젊은 세대가 있다는 점을 사례로 들며 아직 K콘텐츠가 도달하지 못한 소비자와 시장이 훨씬 많다고 진단했다.
그는 “한국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미국 사람들이 모두 K팝이나 한국 콘텐츠를 잘 아는 것은 아니다”라며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은 그만큼 시장에 기회가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성공한 브랜드라도 미국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안 부사장은 과거 아모레퍼시픽에서 근무할 당시 라네즈의 미국 진출 경험을 소개했다. 당시 중국 등에서 백화점 브랜드로 자리 잡았던 라네즈를 미국 대형 유통업체 타깃(Target)에 입점시키는 방안을 추진하자 내부에서는 브랜드 이미지와 유통 채널이 맞지 않는다는 우려가 나왔다. 그러나 미국 법인이 새로운 유통 전략을 밀어붙였고, 그는 당시 반년 만에 약 3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고 회고했다.
한국에서 브랜드가 어떤 위상을 갖고 있는지보다 미국 소비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다가가야 하는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다. 유통 채널과 가격, 브랜드 포지셔닝까지 현지 시장에 맞춰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과 일본, 한국의 문화산업을 비교하면서도 한국의 글로벌 확장 가능성에 주목했다. 중국은 자국 시장과 문화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인식이 강하고, 일본은 탄탄한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성장해 해외 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해야 할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작았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반면 한국은 제한된 내수 시장을 넘어 해외 소비자와 소통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성장해 왔다. 이런 개방성과 외부 시장을 향한 적극성이 한국 콘텐츠의 글로벌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K는 Korea이자 Kind…결국 팬에게 진심으로 다가가야
안 부사장은 K콘텐츠의 경쟁력을 단순히 한국적인 소재나 독특한 문화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세계 어디에나 재미있고 아름다운 콘텐츠는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다.
그는 “왜 K가 앞에 붙을까. 저는 친절함이라고 생각한다”며 “친절하고 진심으로 다가가는 것, 영어로 하면 ‘Kind’라고 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K가 한국(Korea)을 뜻하는 동시에 친절함(Kind)을 상징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 콘텐츠가 세계 시장에서 지속적으로 사랑받으려면 현지 팬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취향과 문화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실제로 K팝 팬덤은 음악을 넘어 한국의 음식과 미용실, 네일숍 등 라이프스타일 전반으로 관심을 넓히고 있다. K팝 공연을 보기 위해 한국을 찾은 팬들이 한국의 일상과 문화를 함께 경험하는 식이다. 안 부사장은 이런 흐름이 단기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만큼 현지 행사와 팬덤 프로그램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운영해야 한다고 봤다. KCON과 같은 행사가 10년 이상 꾸준히 이어져야 현지 팬들과의 관계가 쌓이고 새로운 트렌드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시장에서 네트워크의 중요성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미국 비즈니스에서는 누구를 알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며 현지 파트너와 미디어를 직접 만나 관계를 구축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인맥을 통해 만남의 기회를 얻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수많은 콘텐츠와 브랜드 사이에서 자신만의 차별화된 스토리를 제시해야 한다. 한국식 유머와 정서를 미국에 그대로 옮기는 것 역시 쉽지 않다. 언어뿐 아니라 문화적 맥락까지 이해하고 현지 관객에게 전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안 부사장은 콘텐츠 사업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못지않게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 결정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모든 사업을 한꺼번에 벌이기보다 자신만의 강점과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작자의 고유한 개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일도 중요하다. 모든 창작자가 캐릭터 상품이나 인형 사업을 원하는 것은 아니며, 자신이 잘하는 분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콘텐츠는 아름답고 행복한 일이지만 사업을 할 때는 냉정한 판단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팬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진정성 있게 다가가는 동시에 시장과 사업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