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는 한국 대중문화의 태동기인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하며 대중문화의 주요 장르로 자리 잡았다. 해방과 한국전쟁, 외환위기(IMF) 등 격동의 시대마다 국민들에게 웃음을 선사해 잠시나마 시름을 잊게 하고 희망을 전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오랜 침체기를 겪으면서 대중문화의 주류 장르에서 점차 멀어졌다. 유튜브 등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 코미디언들이 활동을 이어가고 있지만 과거와 같은 대중적 영향력을 회복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이런 가운데 국내 최초 코미디 레이블 메타코미디가 한국 코미디의 부활과 글로벌화를 동시에 모색하고 나섰다. 언어와 문화적 맥락에 크게 의존하는 장르의 특성상 해외 진출은 여전히 쉽지 않은 과제다. 정영준 메타코미디 대표는 그 해법을 콘텐츠와 잊혀진 전통 장르에서 찾고 있다.
정 대표는 5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빌트모어호텔에서 열린 ‘U-KNOCK 2026 in USA’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코미디 자체만으로 해외에 진출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며 “콘텐츠를 통해 해외로 나갈 기회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코미디 자체로 해외 진출 한계…현지 관객과 접점 넓혀야”
“코미디도 콘텐츠 타고 세계로…대통령도 농담해야”
일본은 만자이 계승했지만 한국은 만담 명맥 끊겨
서영춘 등 원로 코미디언 역사에서 용기 얻어
그는 코미디의 글로벌 진출이 다른 콘텐츠 장르보다 쉽지 않다는 점을 인정했다. 말의 뉘앙스와 문화적 배경, 사회적 맥락이 웃음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수만 명을 모으는 스탠드업 코미디언도 한국에서는 700석 규모의 공연장을 채우는 수준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코미디언 개인의 인지도만으로는 국경을 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정 대표가 주목하는 것은 콘텐츠를 통한 확장 가능성이다. 코미디언의 해외 공연만으로 시장을 개척하기보다 해외 관객이 먼저 한국 코미디와 친숙해질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공연과 사업 기회를 넓혀가는 방식이다. 그는 “그런 기회가 왔을 때 재미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 미국 방문에서 얻은 수확도 글로벌 진출에 대한 공감대였다. 현지 엔터테인먼트 업계 관계자들과 교류하면서 한국뿐 아니라 해외 코미디 업계 역시 국경을 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정 대표는 “미국 쪽 관계자들도 코미디의 해외 진출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라며 “일본 요시모토와 만났을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누군가 먼저 성공적인 해외 진출 모델을 만들어내면 다른 사업자들도 그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백신 개발에 비유하며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있는 만큼 누군가 한 명이 길을 뚫어내면 우리도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웹툰이 만화를 살렸듯”…사라진 만담의 부활에 도전
정 대표가 특히 주목하는 분야는 만담이다. 일본의 만자이(漫才)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와 재치 있는 말장난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코미디 장르다. 일본에서는 젊은 세대까지 즐기는 대중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지만 한국에서는 어느 순간 명맥이 약해졌다.
그는 한국과 일본의 대중문화가 형성된 역사를 비교하며 만담의 부활 필요성을 강조했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한국과 일본에 트로트와 엔카, 만화와 만가, 만담과 만자이 등 비슷한 문화적 형식이 자리 잡았지만 이후 두 나라의 계승 양상은 달라졌다는 설명이다.
정 대표는 “일본은 세 가지 장르를 모두 계승했지만 한국은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며 “웹툰이 만화를 살려냈고 미스터트롯이 트로트를 살려냈듯 이제는 만담을 살리고 싶다”고 강조했다.
실제 메타코미디는 일본의 만자이를 한국 관객에게 소개하고 자사 공연장에서 관련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정 대표는 “한국에 만담을 가져와 공연하고 있는데 반응이 좋고 팬들도 생기고 있다”며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과거 한국에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던 만담을 오늘날의 관객에게 맞는 콘텐츠로 재탄생시키겠다는 구상이다.
“옛날에도 지금과 비슷한 어려움”…서영춘 등 원로 코미디언에게서 용기
정 대표가 코미디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된 배경에는 한국 코미디의 역사가 있다. 업계가 어려움을 겪고 여러 논란으로 고민이 깊었던 시기, 그는 한국 코미디의 과거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말과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코미디는 표현 하나에도 논란이 생길 수 있고 시대와 사회 분위기에 따라 제약을 받기도 한다. 지금의 어려움이 처음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1930년대부터 1950년대, 1970년대까지 과거 코미디언들이 어떤 환경에서 활동했고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살펴봤다. 특히 원로 코미디언 서영춘 등 앞선 세대의 발자취를 찾아보며 지금과 다르지 않은 고민과 고난이 반복돼 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했다. 정 대표는 “한국 웃음사 관련 책을 찾아보다 보니 옛날에도 지금과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며 “코미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장르라는 생각을 하면서 용기를 많이 얻었다”고 말했다. 과거 코미디언들이 겪었던 어려움이 오히려 지금 자신이 걷는 길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힘이 됐다는 것이다.
“대통령도 농담해야”…오바마처럼 유머를 즐기는 사회 되길
정 대표는 코미디가 무대와 방송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일상에서 농담을 주고받고 웃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문화가 형성돼야 코미디 산업도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특히 사회적 영향력이 큰 사람들이 먼저 유머를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그는 “대통령이 농담을 해야 한다”며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미국 정치인들이 대중과 소통할 때 유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문화를 언급했다. 그는 “미국 대통령도 농담을 많이 하고 오바마가 인기를 끈 것도 바로 그 위트있고 때로는 유머러스한 농담 덕”이라며 “한국에서는 농담만 하면 그것을 문제 삼는 경우도 종종 있다. 높은 사람들이 농담을 많이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미국을 방문한 영국 찰스 3세 국왕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주고받은 농담도 인상 깊게 봤다고 했다. 양국의 역사와 정치적 맥락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고급스러운 유머가 오가는 모습이 흥미로웠다는 것이다. 정 대표는 “미국 역사와 영국 역사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며 “농담은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코미디를 좋아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명쾌한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왜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묻는 것처럼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라는 것이다. 다만 코미디를 향한 애정만큼은 분명했다. 그는 스탠드업 코미디와 일본 만자이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일본 코미디언이자 소설가인 마타요시 나오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영화 ‘불꽃(히바나)’도 인상 깊게 본 작품으로 꼽았다. 코미디언의 성장과 현실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자신을 코미디를 좋아하지만 웃길 줄은 잘 모르는, 그러나 웃음을 좋아하는 프로듀서라고 규정한다. 직접 무대에 서기보다 좋아하는 코미디를 발굴하고 무대와 콘텐츠로 만드는 역할에 집중해 왔다는 것이다. 정 대표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평생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미국 속담이 있다. 우리나라는 그 반대”라며 “그런데 저는 이 일이 너무 재미있다”고 말했다. 이어 “코미디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이 이 기사를 읽을 수도 있겠지만, 좋아하는 일을 일로 하면 일은 더 이상 일이 아니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사라진 만담을 되살려 한국 코미디를 해외에 진출시키고 싶다는 정 대표의 목표가 실현될지 관심이 집중된다.
한편 로스앤젤레스(LA)에서 개최한 ‘유녹(U-KNOCK) 2026 in USA’는 우리 중소기업의 글로벌 진출 전략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구경본 콘텐츠기반본부 본부장은 “유녹이 한국계 할리우드 리더 모임인 KALH(Korean American Leaders in Hollywood)와 같은 실질적인 네트워크를 가지고 투자유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며 “해외 투자는 단발성이 아니라 현지 네트워크를 꾸준히 가져가 발전시키는 것으로 앞으로 콘진원은 이러한 방향성으로 우리 기업에 지원할 것”이라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