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요약
-전쟁으로 유가·정제마진 급등했지만 오일 메이저들은 미래 수요 둔화 우려에 투자 주저
-OPEC+도 전쟁 이후 원유 공급 과잉을 우려해 12월 생산목표 동결
-에너지 전환기에 석유 수요와 공급 조정 속도가 엇갈리며 가격 불안 반복 가능성
최근 국제유가는 브렌트유 기준 배럴당 110달러를 웃돌고 있습니다. 미국·이란 갈등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원유와 석유제품 공급망이 흔들린 결과입니다. 항공유와 경유 가격도 크게 오르면서 정유업계는 이례적인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시장에서는 석유 수요 둔화와 미래 공급 과잉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당장은 부족한데 미래에는 남아돌 수 있다는 전망입니다. 어떻게 된 이야기일까요?
오일 메이저, 물 들어왔는데 노 못 젓는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올 3분기 미국 엑슨모빌·셰브런과 영국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셸, 프랑스 토탈에너지스 5개사의 올 3분기 순이익은 500억 달러(약 67조 2000억 원)를 기록했습니다. 미국과 이란 전쟁으로 중동 석유제품 생산이 크게 차질을 빚은 데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정제설비에 대한 공격을 이어가면서 공급부족이 확대돼 정제마진이 크게 뛴 영향인데요. 올 3분기 미국 정유사의 경유·항공유 크랙 스프레드는 전년 동기 대비 3배가량 높아졌습니다. 경유·항공유가 그만큼 원유보다 훨씬 비싸졌다는 의미입니다. 올 3분기 유럽 종합 정제마진도 1년 전보다 약 4배 올랐습니다.
정제마진 고공 행진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경유 부족 현상이 내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고요. 그렇다면 오일 메이저들이 ‘전쟁 특수’를 확장하기 위해 설비 투자를 늘리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FT는 이들이 대신 빚을 갚거나 자사주 매입 규모를 확대하는 등 주가 부양에 나섰다고 지적합니다. 장기적으로 에너지 전환에 따라 석유제품의 수요 증가세 둔화하고, 감소세로 돌아설 수도 있다는 전망이 오일 메이저들이 신규 설비 투자에 소극적인 이유입니다. 대규모 투자가 이뤄지는 정유시설은 건설부터 상업 가동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그 시점에는 시장 환경이 지금과 전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 수요가 정점을 지나 공급 과잉에 빠질 수도 있다는 판단이 깔린 것이지요.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세계 정제 석유제품 수요가 내년 정점에 도달한 뒤 감소할 것으로 전망한 바 있습니다.
이런 흐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영국 에너지 연구기관인 에너지 인스티튜트에 따르면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 동안 세계 정제능력은 연평균 0.6% 증가해 같은 기간 소비량 증가율인 1%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특히 서구권에서는 정제능력 축소가 두드러졌습니다. 앨런 굿 모닝스타 애널리스트는 “미국, 유럽 등 서방에서 신규 정유소 건설에 나설 기업은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당장 높은 정제마진보다 앞으로 수십 년간 이어질 사업의 수익성을 더 중요하게 판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산유국도 원유가 남아돌까 걱정한다
산유국 역시 미래 공급 과잉 가능성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만 정유업체들과는 처지가 조금 다릅니다. 정유업체들이 수십 년 뒤까지 내다보며 신규 설비투자를 결정해야 한다면, 산유국들은 당장 내년 원유시장의 수급 변화를 예측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석유수출국기구 플러스(OPEC+)는 1일(현지 시간) 12월 원유 생산목표를 기존과 동일하게 유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미국·이란 전쟁으로 호르무즈해협을 통한 수송에 차질이 빚어지고, 중동 산유국들의 실제 원유 생산량도 목표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임을 고려하면 다소 의아한 결정일 수 있습니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웃돌고 있는 만큼 생산을 늘려 수익을 확대할 유인도 충분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OPEC+가 주목하는 것은 지금보다 전쟁 이후의 수급 상황입니다. 호르무즈해협을 통한 원유 수송이 정상화되고 그동안 중단됐던 생산이 재개되면, 국제 원유시장이 공급 부족에서 공급 과잉으로 빠르게 전환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IEA를 비롯한 에너지 기관들이 제기해온 공급 과잉 가능성이 다시 부각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난달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은 내년 4분기 브렌트유 가격이 배럴당 70달러대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습니다.
당장 중요한 변수는 전쟁이 언제 끝나고, 중동의 원유 생산과 수출이 얼마나 빠르게 정상화하느냐입니다. 여기에 세계경제 성장 둔화와 석유 수요 증가세 약화까지 겹친다면 전쟁 이후 공급 과잉 압력은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
부족과 과잉이 동시에
지금 석유 시장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에너지 전환기의 또 다른 역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장은 전쟁으로 원유와 석유제품이 부족해 가격이 치솟고 있지만, 정작 산유국과 정유업체들은 앞으로 석유가 남아돌 가능성을 고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기차 보급과 에너지 효율 개선, 세계경제 성장 둔화 등으로 석유 수요의 미래가 불확실해지면서 현재의 고유가만으로는 생산과 설비 투자를 늘릴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하는 것이죠. 석유의 시대가 저물어간다는 전망이 역설적으로 석유가 여전히 필요한 시대의 에너지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미국 중간선거라는 변수까지 다가오고 있습니다. 선거 결과가 미국의 에너지 정책과 국제 석유 시장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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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Petro)에서 전기(Electro)까지. 에너지는 경제와 산업, 국제 정세와 기후변화 대응을 파악하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기자 구독, 또는 [조양준의 페트로-일렉트로] 연재 구독을 누르시면 에너지로 이해하는 경제 인사이트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