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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경 “다정하지 않아도 일 기깔나게 잘하는 여성 리더 그리고 싶었죠”

31.10.2026

지난해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가 직장인의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해 커다란 공감을 얻었다면, 올해는 티빙 오리지널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의 박현숙 부장이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극 중 박 부장은 사내의 여러 상황과 구성원들의 면면을 꿰뚫고 있으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만 입을 열고, 자신의 판단을 짧고 명확하게 전달한다. 감정을 앞세우지 않는 담백한 태도와 군더더기 없는 말이 오히려 깊은 인상을 남긴다.

다정한 위로보다 정확한 판단과 일에 대한 신뢰를 앞세우는 박 부장의 모습은 ‘기분이 태도가 되는’ 상사가 아닌,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리더를 바라는 직장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현실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는 의미에서 ‘유니콘 부장’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박 부장을 연기한 배우 박보경을 최근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배우 진선규의 아내로 먼저 알려졌던 박보경은 이제 ‘대학로 여배우들의 희망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오랫동안 무대에서 연기 내공을 쌓아온 그에게 대중의 관심은 반갑고도 낯선 변화다. 그는 요즘 마치 ‘로또 1등’에 당첨된 기분이라며 웃었다. 직장인들의 공감을 끌어낸 캐릭터를 만들어낸 과정을 들여다보면 오랜 시간 다져온 연기자의 고민과 섬세한 관찰이 드러난다.

다정함 대신 상식과 합리적 태도…직장인들이 열광한 박 부장 리더십

박보경이 박현숙을 표현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권위보다 신뢰였다. 친절하고 다정해서가 아니라 일을 잘하기 때문에 구성원들이 인정하는 사람이다. 박보경은 박현숙을 ‘다정하지 않은데 일을 기깔나게 잘하는 여자’라고 설명했다. 상사의 권위는 목소리를 높이거나 감정을 드러내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판단과 일관된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해석이다.

“직원들을 다정하게 대하거나 감정적으로 다독이는 방식이 아니더라도, 일을 잘하고 판단이 정확하기 때문에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했어요. 워킹맘이라는 이유로 자식이 핑계가 되지 않는 여자이기도 하고요.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 만큼 자기 일을 잘하는 사람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시선 하나, 짧은 말 한마디…디테일로 완성한 카리스마

“대본에 정답이 있다”…말투보다 관계의 맥락을 읽다

인물의 성격은 대사뿐 아니라 시선 처리에서도 드러난다. 연출진은 상대를 계속 바라보며 반응을 살피기보다 중요한 말을 할 때만 눈을 맞추도록 했다. 시선의 빈도와 타이밍을 조절해 인물의 태도를 표현한 것이다.

“칭찬을 하든 지적을 하든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는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는 거죠. 그 외에는 굳이 시선을 계속 주지 않아도 되고요. 그런 방식으로 인물의 태도를 정리할 수 있었어요.”

박보경은 말의 속도와 길이, 시선의 방향처럼 사소해 보이는 요소들을 통해 인물을 구체화했다.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 캐릭터일수록 작은 행동 하나가 인상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대사를 어떻게 전달하고 상대를 언제 바라보느냐까지 세밀하게 조율하며 인물의 성격을 쌓아 올렸다.

박보경은 인물을 구축할 때 대본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항상 대본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그는 자신의 해석을 앞세우기보다 대사와 다른 인물들의 반응을 통해 캐릭터를 읽어낸다.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의 거친 말투 역시 단순한 감정 표출로 접근하지 않았다. 무뚝뚝하고 직설적인 말 뒤에는 오랜 시간 함께 일하며 쌓아온 관계가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말의 세기보다 그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다는 것이다.

일도 엄마도 포기할 수 없는 현실…워킹맘의 책임감과 사랑

“엄마가 미안해”…배우 박보경의 경험이 더한 진정성

박현숙이 직장인들의 공감을 얻은 또 다른 이유는 유능한 직장인이면서 동시에 엄마라는 점이다. 박보경은 일과 육아 사이에서 고통받는 모습만 부각하기보다 일하는 여성의 능력과 모성애를 함께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워킹맘이라고 해서 계속 힘들어하고 희생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어요. 엄마로서의 사랑도 보여주고 싶었죠. 일도 잘하고 싶고, 아이에게도 좋은 엄마이고 싶은 마음은 함께 존재하니까요.”

일 때문에 가족에게 미안함을 느끼더라도 일을 포기하지 않고,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자신의 일을 내려놓지도 않는 삶. 박보경은 일과 가정 중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문제로만 그려지지 않는 워킹맘의 현실을 인물에 담고자 했다.

박보경 역시 어린 딸을 두고 일하러 나가야 했던 시절, 아이가 우는 모습을 뒤로하고 집을 나서야 했다. 지금은 딸이 자라 엄마의 일을 응원해 주지만,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느끼는 미안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역시 딸에게 먼저 “엄마가 미안해”라는 말을 건네곤 했다.

자신의 경험은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인물의 감정을 이해하는 단서가 됐다. 다만 개인의 경험을 그대로 옮기기보다 극중 인물이 처한 상황에 맞춰 감정을 구체화했다. 일과 육아 사이에서 느끼는 미안함과 책임감은 개인의 사연을 넘어 많은 직장인 부모가 공유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대학로 여배우들의 희망의 아이콘”…기다림 끝에 만난 기회

박보경은 오랜 시간 대학로에서 연기해 온 배우다. 어린 시절 조용한 편이었던 그는 연기 학원에 다닌 지 두 달 만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지원할 만큼 과감하게 연기에 뛰어들었다. 이후 주어진 역할을 성실하게 해내며 자신만의 연기 세계를 쌓았다.

그의 연기 방식은 인물의 행동에 담긴 이유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악역을 맡더라도 무조건 더 악하게 표현하기보다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하는지부터 살핀다. 인물이 처한 상황과 선택의 이유를 파고들어야 연기에도 설득력이 생긴다는 생각에서다.

아이를 키우고 30대에서 40대로 넘어가면서 미디어 연기는 자신에게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렇다고 연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최근 후배 배우들이 건네는 ‘대학로 여배우들의 희망의 아이콘’이라는 말은 각별하다. 자신처럼 오랫동안 무대에서 활동한 여성 배우들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의미다.

무엇보다 박보경에게는 대본에 자신의 배역 이름이 적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남다른 감동으로 다가온다. 과거에는 ‘아줌마 1’ ‘아줌마 2’처럼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는 역할을 맡기도 했지만, 이제는 박현숙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로 작품의 한 축을 담당한다. 배역의 비중을 넘어 이름 있는 인물의 삶과 성격을 깊이 있게 표현하고, 그 이름으로 시청자들에게 기억될 수 있다는 사실이 벅차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연기를 이어온 배우에게 이런 기회는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무대에서 묵묵히 쌓아온 시간이 대중과 만나는 기회로 이어지고, 자신이 연기한 인물이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큰 기쁨이다. 박보경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가 고맙고 소중하다며, 좋은 연기로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다.

“연기를 포기한 적은 없어요. 그런데 한 10년 정도 일을 안 하다보니 내가 포기하지 않아도 연기를 못하게 될 수도 있겠구나, 기회가 안 올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기도 했죠.”

이처럼 오랜 기다림 끝에 그는 지난 7월 ‘제5회 청룡시리즈어워즈’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레이디 두아’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데뷔 이후 첫 수상이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사라 킴(신혜선)의 절친 정여진 역을 맡아 극 초반을 이끌며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다.

나이 들수록 깊고 넓어지는 연기 스펙트럼…“박보경 염두에 둔 역할 만나고 싶죠”

그가 오래 바라보는 배우는 케이트 블란쳇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다양한 인물을 맡으며 연기 세계를 확장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40대와 50대, 60대에 그 나이에 어울리는 역할을 해나가며 나이 들수록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의 폭을 넓히고 싶다는 바람이다.

“언젠가는 ‘이 역할은 박보경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저만이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 역할을 만나고 싶죠.”

새로운 장르에 대한 욕심도 드러냈다. 판타지 작품에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을 연기해 보고 싶다는 그는 “‘무빙’을 보면서 내게도 초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웃었다. 아직 차기작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대본을 살펴보며 다음 역할을 기다리고 있다.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 시즌2가 제작된다면 가장 기대되는 캐릭터는 박현숙 부장이다. 서는 곳이 달라지면 보이는 것도 달라지듯 임원 승진 이후 박현숙 부장은 어떤 모습일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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