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살 만하다’고 모든 것이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가. 어떤 이야기를 하며 사는가.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노동시간은 얼마나 되는가 등등 구석구석 살펴보는 것이 삶의 질에 제대로 접근하는 방법이다.” (책 ‘우리가 걸어온 길 나아갈 길’ 中)
1992년부터 건국대,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 등을 지낸 후 웅지세무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최영한(65) 가천대 경영학과 초빙교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늘 자랑스러웠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이 끝난 뒤 우리 국민들은 잘 살기 위해 혼연일체가 되어 피땀 흘리는 노력을 해왔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비롯한 숱한 역경을 이겨낸 우리나라는 어느덧 선진국 문턱을 넘어, 그 안으로 진입하는 단계까지 왔다. 세계 경제순위 9위(2025년 14위)까지 올라선 한국을 향해 세계인들은 ‘한강의 기적’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현실은 사뭇 달랐다. 최 교수가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은 좀처럼 성장하는 것 같지 않았고, 국민 살림도 윤택해지지 않았다. 이웃과의 대화는 끊기고, 자식과 나누는 이야기마저 줄어들었다. ‘삶의 질이 높아졌다’는 지표에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우리 국민이 더 잘 살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최 교수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정치·경제·교육·문화·사회 다섯 가지 테마별로 ‘우리가 걸어온 길 나아갈 길’을 짚어봤다. 우리나라가 명목상 선진국이 아닌 진정한 선진국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는 최 교수를 만났다.
정치적 후진국 한국…해법은 ‘교육’
“대한 국민은 정치와 관련해 매우 불행한 국민들이다. 허구한 날 듣고 보는 것이 독재, 탄핵, 재판, 농성, 말싸움, 뇌물, 갑질, 부정청탁이니 사회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기가 무척 힘들다.”
최 교수는 “우리나라 정치는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며 그 이유로 △지역주의 폐해 △간접선거제도의 문제점 △대통령 권한 쏠림 등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올바른 국가로 거듭나려면 유권자 국민의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이 변해야 정치도 변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제21대 대선 당시 각 가정에 배달된 선거공보물에 들어간 비용은 370억 원이다. 그러나 이 공보물들은 대부분 가정에서 뜯기지도 않은 채 버려졌다. 유권자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최 교수는 “민주시민을 위한 기본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 투표하는 이유, 투표하는 방법, 선거에 임하는 자세 등을 어릴 때부터 꾸준히 가르쳐야 한다”며 정치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요즘 청년들은 무언가가 싫으면 아예 말을 안 한다”며 “정치 관련해서도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인 태도보다는 ‘이건 아니다’, ‘이건 잘한다’ 등 본인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회문제 해결 위해 ‘지역균형발전’ 우선
사회 현상에 관심이 많다는 최 교수는 한국 사회에 △부동산 폭등 △소득 분배의 불평등 △빨리빨리 문화 △독자생존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고 말한다. 최 교수는 “부동산 관련해서는 선뜻 말을 꺼내기 조심스럽다”면서도 “지역 간 균형 개발에 실패한 위정자, 잘못된 정책으로 가격 폭등을 야기한 정치인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했다.
그는 “제대로 된 지역균형발전이 대부분의 사회 문제를 해결할 열쇠”라고 본다. “지역이 고르게 발전해 굳이 서울에, 기어코 강남에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진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집값은 안정되리라 확신합니다. 부동산뿐 아니라 사회 불평등과 소득 격차 모두 지역균형개발이 이뤄지면 자연스레 해결될 것입니다.”
최 교수는 선진사회로 가기 위해선 사회구성원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그는 “행복한 삶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고 그것에 몰입할 때 가능하다”며 ‘일’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부모님, 선생님이 강요하는 것보다 본인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 그 일을 사랑하는 사회, 각기 다른 일을 하며 흥겨운 마음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회, 이것이 선진사회의 이상향이고 대한민국이 가야 할 방향이다.”
너도나도 의대·반도체 선호…철학의 부재탓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는 ‘철학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 입시 중심 구조, 암기식 학습, 사교육 팽창, 영어 과잉, 교권 약화는 모두 같은 뿌리에서 자란 가지들이다. 교육은 인간을 길러내는 일이다. 사고 중심으로 가야 한다.”
최 교수는 성적이 뛰어난 학생들이 의대로 몰리는 나라가 아니라 공학과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 등 저마다의 길로 뻗어 나가 조화를 이루는 나라를 꿈꾼다. 30년 넘는 세월 동안 교편을 잡아온 그는 “과거 학생들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고 길을 개척해나가는 것을 지켜볼 때 정말 행복했다”며 “요즘에는 그런 진취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아 불편하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아쉬워했다.
최 교수는 교육 현장에서 철학이 배제된 탓에 ‘의대 열풍’, ‘인공지능(AI)·반도체 열풍’ 등이 심화하는 것이라고 본다. 학생들이 본인이 진정 좋아하는 일을 찾기보다 사회 분위기에 휩쓸린다는 지적이다. 종로학원 및 업계에 따르면 2027학년도 수시모집에서 연세대·고려대·한양대·성균관대·서강대 등의 반도체 계약학과 지원자 수는 총 5992명으로 전년 대비 19.4% 증가했다. 유례없는 AI·반도체 호황 속 계약학과 쏠림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최 교수는 “의대든, 반도체든 어디 한 곳에 쏠리는 것은 좋지 않다”며 “반도체학과를 못 간다고 삼성전자에 입사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 좋아하는 일을 스스로 찾아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AI 기술이 교육과 인문학에 미칠 영향을 묻자 최 교수는 “이제 학생들은 더 이상 교수에게 질문하지 않고, 과제도 AI로 하다 보니 다 고만고만한 내용을 다룬다”며 “교육 관점에서 AI가 과연 진보일까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다. 이어 “학생들이 책 한 권도 읽지 않고 AI에 ‘책 내용을 요약해달라’고 한다”며 “AI 시대 인문학은 더 중요해지겠지만 역설적으로 경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것 같다”고 내다봤다.
최 교수는 “이럴 때일수록 독서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정한 선진국으로 나아가려면 우리만의 고유한 창의성이 빛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책을 읽고 사유하며 자신을 들여다보고, 무엇을 해야 할지 스스로 찾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는 독서와 사유가 ‘개인의 다양성’을 키울 것이라며 “전체가 아닌 개인이 존중받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여론조사 결과 ‘정치는 후진국, 경제는 중진국, 문화는 선진국’이라는 것이 우리 국민의 생각”이라고 집약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5년 한국인의 의식·가치관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대중문화에 대해 국민의 96.4%가 ‘우수하다’고 평가했다. 다만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은 이전 조사(2022년)보다 약해졌다.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운지’를 묻는 질문에 76.1%가 ‘그렇다’고 응답했는데, 이는 2022년보다 13.7%포인트 감소한 수치다.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에서도 76.5%가 긍정적으로 답해 2022년(90.4%)보다 13.9%포인트 하락했다. 같은 조사에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로는 △빈부격차(23.2%) △일자리(22.9%) △부동산·주택(13.2%) △저출생·고령화(10.8%) 등이 꼽혔다.
최 교수는 “우리는 비교적 넉넉히 잘 사는 나라임을 인정해야 한다”면서도 “이제 남은 과제는 선진국 자리로 확실하게 들어가 후손들에게 선진국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물려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잘 사는 나라가 가만히 앉아서 그냥 잘 사는 것은 아니다. 읽고, 쓰고, 배우고, 공부하며 수학, 과학, 철학, 역사, 음악, 미술, 체육 등이 어우러져 고유의 문화와 철학 그리고 연구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대한민국은 지금보다 더 큰 고통도 극복했던 나라다. 그렇기에 최 교수는 앞으로도 훨씬 더 나아진 대한민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개개인이 반짝반짝 빛나는 사회가 오기를 기대하는 최 교수는 매일 읽고, 쓰고, 부지런히 말한다. “우리가 나아갈 길은 무궁무진하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