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 볼라 네그라’(La Bola Negra)는 기록되지 못한 사랑과 감춰진 정체성이 개인의 삶을 넘어 세대에 걸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되짚는다. 올해 토론토 국제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스페인 영화가 오랫동안 품어온 질문들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로스 하비스(하비에르 칼보, 하비에르 암브로시) 감독이 연출한 영화는 1932년, 1937년, 2017년을 배경으로 세 남자의 이야기를 교차시킨다. 스페인 제2공화국 시절 아버지의 사교 클럽에 가입하려다 거절당한 카를로스(밀로 쿼페스), 내전 속에서 포로를 감시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가는 세바스티안(기타리카델라푸엔테),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침묵의 유산을 마주하게 된 알베르토(카롤로스 곤잘레스)가 그 주인공이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독재라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얽혀든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을 하나로 잇는 매개체는 스페인의 시인이자 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남긴 미완성 작품이다.
원제인 ‘라 볼라 네그라’를 직역하면 ‘검은 공’이지만, 작품이 지닌 시적 울림을 살리기 위해 원제 그대로 옮겼다. ‘검은 공’은 과거 서구의 클럽이나 단체에서 신규 회원 가입을 결정할 때 사용하던 비밀 투표 방식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흰 공은 찬성을, 검은 공은 반대, 곧 ‘배제’를 의미했다. 영화에서 이 제목은 단순한 역사적 관습을 넘어, 특정 개인을 집단에서 배제하고 정체성을 숨기게 만들며, 기록되지 못한 사랑과 삶을 침묵 속에 묻어버리는 폭력성을 상징한다. 그러나 침묵 속에 매장된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또 다른 형상이 되어 현재로 돌아온다. 그 과거의 한가운데에 세바스티안이 있으며, 그를 연기한 기타리카델라푸엔테는 이 영화의 심장과도 같다. 두 감독은 구상 단계부터 그를 염두에 두고 캐릭터를 집필했다. 욕망과 정체성, 그리고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무언가를 향한 열망 등, 그가 앨범 ‘스패니시 레더’(Spanish Leather)를 작업하며 품었던 고민들이 세바스티안이라는 인물과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 출신의 슬픈 눈을 가진 트럼펫 연주자 세바스티안은 거대한 내면 세계를 품은 소년과 같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정치적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국민군 병사인 그는 자신이 감시해야 할 공화파 포로 라파엘을 만나면서 내면의 욕망을 조금씩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욕망을 표현할 언어도, 그것을 누릴 자유도 없는 시대 속에서 그는 인정과 불가능 사이의 경계에 선다.
미겔 베르나르도가 연기한 라파엘은 세바스티안이 자신의 욕망을 ‘이름 붙일 수 있게’ 이끌어주는 인물이다. 1937년 스페인 내전의 한복판에서 세바스티안의 감정을 처음으로 일깨운다. 전쟁이 몰고 온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늘 위태롭다. 언제 헤어지거나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긴박한 시간 속에서, 오직 눈빛과 침묵, 그리고 작은 몸짓만이 서로를 연결할 뿐이다.
세바스티안과 라파엘, 1932년의 카를로스와 2017년의 알베르토는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욕망해도 되는가’, ‘진짜 모습을 드러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알베르토는 앞 세대가 상상조차 못 했을 자유를 누리지만, 그들이 남긴 침묵의 무게와 고통을 여전히 짊어지고 있다.
이 모든 질문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울려 퍼지는 기타리카델라푸엔테의 노래 ‘라 니에베’(La nieve)로 응축된다. 단순한 멜로디와 절제된 가창 덕분에 이 노래는 관객에게 특정한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각자가 느끼는 여운 곁에 가만히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다. 라울 레프리의 스코어가 각 인물에게 부여한 고유한 음색(세바스티안의 금관악기, 카를로스의 피아노와 합창, 알베르토의 침묵)이 서서히 어우러져 하나의 울림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라 니에베’가 남긴 여백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기타리카델라푸엔테는 이 영화를 통해 로르카가 교과서 속에 갇힌 먼 과거의 인물이 아닌, 숨 쉬는 생생한 존재로 관객에게 다가가기를 바란다.
12월 2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는 화제작 ‘라 볼라 네그라’는 기록되지 못한 이야기, 침묵당한 목소리, 잊혀간 삶의 흔적들을 다시금 되살려낸다. 나아가 역사 속에서 동성애를 예술의 언어로 말할 수 있었던 드문 순간들을 기념하며, 로르카를 “우리 모두에게 문을 열어두고 간 아버지”로 느끼게 만든다. 영화 ‘라 볼라 네그라’는 닫혀 있던 문을 다시 한 번 활짝 열어젖힌다.
/하은선 골든글로브 재단(GGF)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