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가 인공지능(AI) 시대에 스스로 사고하는 과학기술 인재를 기르기 위한 방안으로 문학·역사·철학 등 기초 인문학 교육 역량을 강화한다. AI의 역할이 지식 전달을 넘어 전쟁 수행에까지 확대되는 시대에 기술개발을 주도하는 공학자가 사회적 책임과 윤리적 판단력을 갖춰야 한다는 취지다.
배충식 KAIST 총장은 15일 대전 유성구 KAIST 본원에서 진행된 서울경제신문 인터뷰에서 “공학 기술은 생명과 안전, 환경과 깊게 연결돼 있다”며 “철학을 바탕으로 한 주체적인 인간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공학을 하는 사람들이 철학적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자칫 효율에만 매달릴 수 있다”며 “기초 인문사회과학 분야 교수들을 더 초빙하고, 문사철 교육을 강화하도록 담당 학부와 대학에 요청하고 있다”고 밝혔다.
배 총장은 서울대 항공공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임페리얼칼리지런던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8년 KAIST에 부임해 공과대학장 등을 거쳐 올해 7월 제18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기본이 강한 글로벌 혁신 선도대학’을 비전으로 내건 그는 AI를 중심으로 교육·연구·행정을 개편하면서 학생 스스로 원리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이날 인터뷰에서 배 총장은 AI가 학습 과정을 대신하는 최근 교육 환경에 강한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AI가 읽고 생각하고 쓰는 과정을 대신하면 과제의 완성도가 높더라도 학생 자신의 사고력은 길러지지 않을 수 있다며 기존 교육 방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해법으로 제시한 것이 ‘AI 프리(free)’ 교육이다. 학생이 미리 공부해온 뒤 강의실에서는 AI와 인터넷의 도움 없이 스스로 생각하고 글을 쓰고 말하고 발표하도록 훈련하는 방식이다. AI 사용 여부는 수업의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 자연과학과 공학에서도 기본 원리를 이해하고 자신의 논리로 설명하는 활동에서는 AI 사용을 제한한다. 반면 전공 지식을 실제 문제에 적용하는 활동에서는 AI를 적극 활용하되, 학생이 결과의 오류와 타당성을 직접 검증하도록 한다. AI에 맡길 부분과 스스로 판단해야 할 부분을 구분하는 능력을 함께 기르겠다는 구상이다.
철학 교육은 이같은 교육 재편의 토대다. 배 총장은 “공학자가 기술의 목적과 사회적 영향을 판단하지 못하면 성능과 효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명·안전·환경에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며 “AI 없이 사고력과 기초 원리를 익히는 교육, AI를 활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교육, AI 자체를 설계하고 개발하는 교육을 연결하는 방식을 구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에서는 한국의 제조업 기반을 활용한 피지컬 AI에 힘을 싣는다. 배 총장은 한국이 기초부터 응용까지 다양한 인재와 산업 구조를 갖춘 ‘풀스택’의 강점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이에 따라 “소버린 AI로 필요한 기반 역량을 확보하면서 제조업에 AI를 적용하면 피지컬 AI에서 세계가 모델로 삼는 수준에 이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를 위해서는 AI의 판단을 실제 기계의 움직임이나 생산 공정으로 연결해야 한다. 배 총장은 “알고리즘과 반도체뿐 아니라 기계 제어, 소재와 공정 등에 대한 전문지식이 필요하다”며 “자연과학과 전자·전산, 기계·화공·재료·바이오 등 KAIST의 연구역량을 결합하면 선도적인 피지컬 AI 모델과 제품을 제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운영 중인 AI대학이 구심점을 맡고 AI연구원이 분야별 교수진을 연결하며, 엔비디아 등 기업과의 산학연구를 통해 산업 적용을 추진한다는 구상이다.
입학 전부터 대학원까지 창업 관련 과목을 선택적으로 이수할 수 있는 교육 트랙도 마련한다. 연구 성과가 창업으로 이어지도록 교육을 체계화하기 위해서다. 분절된 기존 과목을 정비하고 학년별 학습 경로를 안내해, 학생이 사업화할 만한 기술을 확보했을 때 주저 없이 도전하도록 돕겠다는 목표다.
나아가 입학 초기에는 성공한 동문들의 경험을 접하며 창업을 진로의 하나로 생각하도록 독려할 계획이다. 배 총장은 “이를 위해 최근 이름을 대면 알 만한 동문들을 직접 만나 후배들을 위한 교육 참여를 부탁하고 있다”며 “이후 경제·경영·회계·세금·법률 등 사업에 필요한 소양을 쌓도록 안내하고, 트랙 이수 사실을 이력서에 기재할 수 있는 인증 방안도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교육과 연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인프라 확충이 중요하다. 배 총장은 “컴퓨팅 자원이 부족하다며 GPU 확보와 함께 기존 자원의 활용도를 높이는 ‘네트워킹’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네트워킹은 외부 기업의 컴퓨팅 시설을 연결해 이용하거나 한 연구실이 사용하지 않는 자원을 다른 연구실이 활용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자체 데이터센터 구축에 필요한 재원과 전력의 한계를 자원 공유로 보완하겠다는 구상으로, 기업과의 구체적인 협력은 현재 기획 단계라고 밝혔다.
나아가 대학 밖 사회에는 실패 후 재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주문했다. 그는 “창업은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도전인 만큼 청년이 몇 차례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제도와 문화가 필요하다”며 “자유롭게 도전적으로 미래 지향적인 연구나 교육을 할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