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이슈와 현상에 밑줄을 긋습니다. 그 배경과 흐름을 들여다보고 의미를 전합니다. <편집자주>
“2학기 중간고사를 완전히 망쳤습니다. 이대로 졸업할 때까지 다니기보다 학교를 그만두고 새로 시작하는 게 나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A군)
A군처럼 고교 1학년 자퇴 후 다시 고교에 입학하는 이른바 ‘내신 리셋(reset)’을 고민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이 늘고 있다. 상위 10%까지 1등급을 받는 5등급제에서는 단 한번이라도 1등급을 놓칠 경우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기존 9등급제에서는 1등급이 상위 4%, 2등급이 누적 상위 11%까지였지만, 5등급제에서는 1등급이 상위 10%, 2등급이 누적 상위 34%까지다. 다시 말해 9등급제에서의 2등급은 상위 11%를 의미했지만 5등급제에서의 2등급은 상위 34%를 뜻한다. 예전에는 한두번쯤 1등급을 놓쳐도 지금만큼 큰 압박감은 느끼지 않아도 됐다는 게 학생들의 설명이다.
“한 번 받은 내신, 대입까지 계속 따라간다”
고교 내신은 현재의 학업 성취도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학교생활기록부를 중심으로 평가하는 대학 입시 전형에서는 주요 평가 자료로 활용된다. 이 때문에 상당수 학생들은 단 한 번의 시험 결과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성적이 좋지 않을 경우 만회할 방법을 고민한다.
사실 예전에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중간고사를 망치면 기말고사에서 만회하고, 기말고사마저 놓치면 다음 학기 중간고사를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자퇴 후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수학능력시험 준비에 집중하거나, 고교에 다시 입학해 내신을 새로 받는 방안까지 생각한다. 온라인 상에서는 재입학 절차와 학교별 여건을 묻는 게시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내신 경쟁이 상대적으로 덜하다고 알려진 지역의 학교를 알아보는 글도 눈에 띈다. 서울 중계동에 사는 한 학부모는 “중계에도 경쟁이 치열한 학교가 있고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곳이 있다”며 “실제 내신을 잘 받기 위해 다니던 학교를 관두고 지역 내 다른 학교로 다시 입학하는 학생을 봤다”고 귀띔했다.
물론 자퇴를 고민하는 이유가 모두 내신 때문인 것은 아니다. 학교생활의 어려움이나 진로 변경 등 여러 사정이 있을 수 있다. 다만 낮은 성적을 만회하기 위해 자퇴와 재입학까지 고려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점은 내신 경쟁의 부담이 학교를 떠나는 선택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내신 9등급에서 5등급으로…경쟁 부담은 줄었나
교육부가 내신 5등급제를 도입한 취지는 기존 9등급제에서 나타난 과도한 내신 경쟁과 과목 선택에 따른 유불리를 완화하는 데 있었다. 1등급 비율을 상위 4%에서 10%로, 2등급 누적 비율을 상위 11%에서 34%로 확대해 등급 경쟁에 따른 부담을 덜어주려 했다. 학생들이 등급 경쟁에만 매달리기보다 다양한 과목을 선택하고 협력하며 학습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선 교육 현장에서는 등급 체계 변경이 오히려 학생들의 압박감을 키운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된다. 증가세를 보이는 일반고 1학년 학업중단자수도 이런 분석에 힘을 싣고 있다. 2024년 9346명이었던 고1 학업중단자수는 내신 5등급제가 고1을 대상으로 처음 시행된 2025년 1만 6명으로 증가했다.
상위권 학교에서는 상위 20~30%대 학생들이 1등급을 받기 어려워졌고, 중하위권 학교에서는 상위 10%대에 해당하는 2등급 학생들이 상위 20~30%대 학생들과 비교해 변별력을 갖기 어려워졌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9등급제에서는 1∼3등급의 누적 기준이 각각 상위 4%, 11%, 23%로 나뉘어 있어 한 단계씩 올라가겠다는 목표를 세울 수 있었다”며 “5등급제에서는 1등급이 상위 10%, 2등급이 누적 34%까지다. 학생 입장에서는 2등급에서 1등급으로 올라가는 장벽이 너무 높다고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강남3구에 집중된 고1 자퇴, 내신 리셋 때문일까
고1 자퇴는 특히 최상위권 학생들이 밀집해 있는 강남3구에 집중됐다. 한국교육개발원 교육통계서비스와 학교알리미 자료에 따르면 2025학년도 강남3구 일반고 학업중단자 816명 가운데 1학년은 473명으로 전체의 58.0%를 차지했다. 강남구가 184명으로 가장 많았고, 송파구 160명, 서초구 129명 순이었다. 강남3구 일반고 1학년 중 학업중단자 비중은 4.49%로, 전체 학년 학업중단자 비율인 2.59%보다 높았다.
입시업계에서는 5등급제 내신 1등급 기준인 상위 10%에 들지 못한 학생들이 남은 학년에서 성적을 만회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수능 준비에 집중하거나 학교를 옮겨 내신을 잘 받기 위해 학업중단을 선택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다만 학업중단 통계만으로 내신 리셋을 목적으로 자퇴한 학생이 늘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학업을 중단하는 사유는 진로 변경, 교우 관계 문제 등 다양하기 때문이다. 내신을 새로 받기 위한 목적의 자퇴를 따로 집계한 공식 통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내신 리셋을 위해 자퇴하는 학생이 있다는 것이다. 성적을 더 잘 받으려고 학생들이 자퇴까지 고민하고 실제 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등급 아니면 ‘아웃서울’”…입시 마케팅도 한몫
학생들의 불안은 입시 정보가 유통되는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사교육 현장에서는 특정 등급을 받지 못하면 서울 주요 대학에 진학하기 어렵다는 식의 설명이 반복된다. 이런 메시지는 복잡한 대학 입시 과정을 단순한 등급 경쟁으로 몰아가고, 학생들에게 부족한 점수를 만회할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불안감을 안겨줄 수 있다.
하지만 대학 입시는 내신 등급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학생부교과전형과 학생부종합전형, 수능 위주 전형은 평가 방식이 다르다. 대학과 모집단위에 따라서도 반영 요소가 바뀐다. 모든 과목에서 1등급을 받아야 서울 주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은 다양한 입시 전형과 진학 가능성을 간과한 채 학생들에게 과도한 압박감을 줄 수 있다.
정확한 입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중요하다. 특정 등급을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절대적인 기준처럼 제시하는 것은 문제다. 그렇게 되면 학생들은 다양한 진학 경로를 모색하기보다 내신을 처음부터 다시 받는 방안을 고려하기 쉽다. 입시 정보가 학생들의 합리적인 판단을 돕기보다 성적 경쟁을 부추기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퇴 후 재입학하면 내신 100% 새로 받을 수 있나
자퇴 후 재입학한다고 해서 모든 성적과 기록이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같은 학교로 재입학하는지, 다른 학교에 새로 입학하거나 편입하는지 등에 따라 절차와 학적 처리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재입학을 결정하기 전에는 학교별 결원 여부와 교육청 규칙과 학교의 학칙 등도 확인해야 한다.
특히 이전에 이수한 학기의 성적과 학생부 기록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희망 대학 입시에서 어떤 자료가 활용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새 학교에 입학하는 경우에도 학적 이력과 성적 처리 방식이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으므로 단순히 자퇴와 재입학만으로 내신을 초기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신 리셋이 논란 속에 교육부가 자퇴 후 다시 신입학하더라도 학적을 이어서 기록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교육부는 5등급제 도입으로 내신 리셋이 가속화됐다고 보지는 않는다면서도 관련 제도를 손질할 가능성은 열어뒀다. 앞으로 제도 개편이 확정되면 내신 리셋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학적 기록 방식이 바뀔 경우 입시에서 자퇴 이력이 어떻게 반영될지도 지켜볼 대목이다.
내신 새로 받으면 유리?…대학별 평가 방식 따져야
내신 리셋이 반드시 성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듬해 더 좋지 않은 성적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대학마다 전형별 평가 방식과 학생부 반영 기준이 다른 점도 고려해야 한다. 새 학교에서 받은 성적이 어떤 방식으로 평가되는지, 이전 학적과 성적 기록이 어떻게 처리되는지에 따라 기대한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학생부종합전형에서는 내신 등급뿐 아니라 과목 선택과 학업 과정, 학교생활에서 드러나는 성장도 평가 대상이 될 수 있다. 자퇴와 재입학에 따른 공백 시기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 수능 위주 전형을 생각하고 있다면 학교를 옮기는 것보다 수능 준비에 집중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결국 내신 리셋은 누구에게나 통하는 입시 전략이 아니다. 막연히 성적을 다시 받을 수 있다는 기대만으로 결정해서는 안된다는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무엇보다 목표 대학의 전형 요강과 학적 처리 기준을 확인해야 한다. 이투스 관계자는 “대학이 원하는 인재상 자체가 바뀌고 있다. 학교생활 태도까지 함께 보는 쪽으로 전형을 설계하는 추세”라며 “자퇴하고 시험 점수만 잘 받으면 된다는 식의 접근을 하는 수험생은 자칫 대학이 뽑고 싶어 하는 인재상과 어긋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학교를 떠나는 것만이 답일까…대안은 없나
자퇴 후 검정고시와 수능 준비에 집중하는 것이 모든 학생에게 불리한 선택은 아니다. 학업 성향과 목표 대학, 준비 정도에 따라서는 학교를 떠나는 것이 더 나은 대안이 될 수도 있다. 다만 학교를 그만두면 정규 수업을 들을 수 없는데다 교사의 지도도 받을 수 없게 된다. 학습 계획과 일상 생활도 스스로 관리해야 한다.
자퇴와 재입학은 단순히 내신을 새로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학업 공백과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 학생부 기록, 대학별 평가 방식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좋지 않은 성적을 만회하려는 마음이 앞서더라도 실제로 얻을 수 있는 이점과 감수해야 할 위험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는 게 교육계 관계자들의 조언이다.
전문가들은 내신 경쟁을 완화하려는 제도 개편이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려면 등급 체계를 바꾸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낮은 등급을 만회하고 진로를 다시 설계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대학별 전형과 평가 기준도 학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할 필요가 있다. 학교를 떠나서 다시 내신을 관리하려는 학생들이 나타나는 현상을 개인 선택의 문제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학생들이 자퇴라는 선택을 하는 대신 학교 안에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교육 제도의 과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