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인공지능(AI) 기업 앤트로픽이 국내 작가 서적의 디지털 복제본을 불법 다운로드한 것으로 나타났다. 앤트로픽은 불법 취득한 서적에 대해 보상하라는 미국 법원의 판결에 따라 한강 등 국내 작가들에게 보상을 제안한 것으로 파악됐다.
15일 서울경제신문의 취재를 종합하면 앤트로픽이 2021~2022년 불법 디지털 복제본을 다운로드한 목록에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포함해 황석영·신경숙 등 한국 작가의 작품 최소 15건이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다.
법적 논란으로 소송 위험에 직면하자 앤트로픽은 도서 구매로 전략을 바꿨다. 2024년 8~11월 앤트로픽 데이터 파트너십팀은 미 법원에 제출한 자료를 통해 “‘한국 (웅진)북센(Booxen Korea)’과 책 구매 계약을 진행하고 있다”면서 “‘수천 권 단위(K)’로 북센에 서적 구매를 조율 중”이라고 밝혔다. 웅진 측은 본지에 “앤트로픽과 계약한 것은 맞다”고 확인했다.
앤트로픽은 2024년부터 전 세계 실물 서적을 구매한 뒤 스캔하는 ‘프로젝트 파나마’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 서적이 작가의 인지 없이 앤트로픽에 판매돼 AI 학습에 사용된 것으로 파악된다.
출판 업계 관계자는 “현행 저작권법상 판매는 가능하지만 그것으로 AI 학습을 시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면서 “아직 국내에는 관련 규정이 공백 상태”라고 지적했다.
2021~2022년 수백만권 다운로드
한강 등 ‘디지털 해적판’ 무단 이용
인공지능(AI)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전 세계에서 AI 모델 학습을 위한 저작물 무단 활용을 두고 소송전이 이어지고 있다. AI 성능 경쟁이 격화할수록 온라인에 없는 고품질 데이터를 확보하려는 기업들과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창작자 간의 대립이 심화되는 상황이다.
15일 서울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한강·황석영·신경숙 등 한국 작가들의 해외 출간 작품 최소 15건은 ‘앤트로픽 저작권 합의 사이트’에 합의 대상으로 올라와 있다.
이는 AI 저작권 분야에서 기념비적인 재판으로 꼽히는 ‘바츠 대 앤트로픽’ 소송과 연관돼 있다. 2024년 8월 안드레아 바츠 등 작가 3인은 앤트로픽을 대상으로 라이브러리 제네시스 등 디지털 불법 복제 라이브러리에서 AI 학습에 디지털 해적판 도서를 무단 사용했다면서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 과정에서 앤트로픽이 도서 데이터를 학습시키기 위한 편법이 낱낱이 드러났다. 앤트로픽은 2021~2022년께에 디지털 불법 복제 라이브러리에서 수백만 권의 책을 다운로드했다.
앤트로픽은 이후 논란이 불거지자 전략을 바꿔 2024년 전 세계 중고서점·출판유통사로부터 실물 서적을 대량 구매하기 시작했다. 앤트로픽은 실물 서적 구매 프로젝트를 내부에서 ‘파나마 프로젝트’라고 불렀으며 “전 세계의 모든 책을 파괴적으로 스캔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2024년 앤트로픽이 작성한 자료를 보면 한국 측의 도서 유통 파트너로 한국 최대 도서유통업체 웅진북센을 선택하고 서적 판매 계약을 진행했다. 자료에는 “현재는 (도서를) 주로 미국·영국에서 들여오고 곧 대만·일본·한국에서도 주문할 계획”이라는 메모가 포함됐다.
상황이 이런데도 한국에는 유통사의 AI 기업 대상 도서 판매에 관한 규정이 없다. 저작권법 제20조에 따르면 저작권자의 동의를 얻어 정당하게 최초 판매된 책에 대해서는 저작권자의 ‘배포권’이 소멸한다.
“우리 작품이 우리 위협” 창작자 반발
EU는 “저작권자 거부땐 불가” 결론
창작자들은 반발하고 있다. AI의 발전에 따라 만들어낸 결과물이 인간의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아지면서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AI 기업들이 동의 없는 저작물 학습으로 창작 생태계를 위협하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주장이다. 또 고서적과 희귀본이 기업의 이윤을 위한 AI 학습에 활용되고 폐기되는 것은 인류 공동체의 자산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전 세계 법원의 판결은 엇갈렸다. ‘바츠 대 앤트로픽’ 소송을 맡은 미국 캘리포니아북부지방법원은 7월 앤트로픽의 손을 일부 들어줬다. 앤트로픽이 합법적으로 구매한 서적을 학습시킨 경우와 디지털 해적판을 다운받은 경우를 나눠 판단한 것이다. 합법적으로 구매한 경우에는 책의 내용이 AI 학습을 거쳐 변형되기 때문에 저작권을 위반하지 않은 ‘공정한 이용(fair use)’으로 판결했다. 다만 불법 복제본은 AI 활용과 무관하게 복제 행위 자체를 근거로 저작권을 침해한다고 결론내렸다. 이에 따라 앤트로픽은 불법 복제본을 다운받은 약 50만 권만 대상으로 총 15억 달러(약 2조 2000억 원) 합의금을 지불하기로 확정했다. 한강을 비롯한 한국 작가들 또한 해당 합의금을 받을 수 있는 목록에 포함됐다. 앤트로픽 측은 합의 도서 저작권자에게 다음 달 15일부터 합의금을 지급할 계획이다.
반면 지난달 29일 미국 연방제3순회항소법원은 톰슨 로이터가 AI 기반 법률 스타트업 로스 인텔리전스를 상대로 자사 법률 서비스의 판례내용 요약자료를 AI 학습에 이용했다며 제기한 소송에서 로이터의 저작권을 인정했다.
유럽에서는 저작권을 더욱 폭넓게 보호한다. 독일 뮌헨지방법원은 7월 음악 AI 수노(Suno)와 독일 음악저작권 관리단체(GEMA) 간 소송에서 GEMA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법원은 AI가 만든 노래의 유사성이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 광범위하고 구체적”이라고 판단했다.
EU는 올해 8월부터 AI법을 시행 중이다. 법에 명시된 특정 목적(연구·비평·보도 등)에 한해서만 제한적으로 학습 면책을 인정해 미국보다 저작권을 엄격하게 보호하고 있다. 작가 등 권리자가 거부 표시를 한 경우 AI 학습용으로 사용할 수 없다. AI 저작권과 관련해 가장 강한 잣대를 갖고 있는 곳은 독일로 AI 내부에 콘텐츠를 저장(Memorization)하는 것 자체를 강력하게 규제하고 있다.
AI 강국인 미국은 여전히 저작권 소송이 진행형이다. 뉴욕타임스는 허가 없이 수백만 건의 기사를 학습시켰다며 오픈AI·마이크로소프트와 소송을 벌이고 있다. 빈스 차브리아 캘리포니아 북부연방지방법원 판사는 메타의 저작권 위반 소송에 대해 메타 손을 들어주면서도 “AI가 기존 저작물 시장에 미치는 피해를 더 충실히 입증하면 다른 사건에서는 원고가 이길 수 있다”고 언급했다.
AI로 만든 ‘딸깍 서적’ 판치는 한국…저작권 보호는 ‘걸음마’
한국이 챗GPT 유료 구독자 수 세계 2위에 오르는 등 인공지능(AI)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AI와 관련한 저작권 보호에는 다른 나라에 뒤처져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럽과 일본에서는 이미 제도가 틀을 갖춘 반면 국내는 이제 막 논의를 시작했으며 내용도 AI 학습보다 AI 창작에 치중돼 있다는 것이다.
15일 한국의 아이지에이웍스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올 9월 한국에서 오픈AI 챗GPT의 앱 월간활성이용자수(MAU)는 1799만 3884명으로 AI 앱 가운데 가장 많았다. 지난해 9월보다 40.6% 증가했다. 2위 앤트로픽의 클로드는 170만 8413명으로 전년 동월 13만 286명과 비교해 1211.3% 급증했다. 1년 만에 이용자 규모가 13배 이상으로 불어난 셈이다. 전 세계로 넓혀봐도 시장조사 업체 센서타워에 따르면 챗GPT의 국가별 매출 비중에서 한국은 5.4%로 미국(35.4%)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다.
하지만 AI 저작권과 관련한 제도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올해 1월 우리나라에서도 AI 기본법이 시행됐지만 인간의 창작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시적인 조항이 없고 AI 창작물에 대한 표시 규정도 모호하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국내에서는 AI 학습보다는 AI를 활용한 저품질 ‘딸깍 출판’ 문제가 먼저 부각되는 분위기다. 딸깍 출판이란 AI로 번역을 돌려 그대로 책으로 내는 등, 저자나 번역자의 개입이 거의 없이 AI만으로 책을 만드는 것을 뜻한다. AI 출판의 시대가 열리면서 최근 5년간 연평균 약 6만2000종 수준이었던 신간이 연 20만~30만권 수준으로 불어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머지않아 인간이 쓴 책보다 AI가 쓴 책이 많아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국회와 업계에서는 대응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 3월 국회에서는 심의를 거쳐 도서관이 AI 출판물에 대해 납본을 받지 않을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한국출판인회의도 지난달 정책포럼을 열고 출판사들이 AI를 활용한 정도를 명확하게 표기하자는 원칙을 발표했다.
AI 학습과 관련해서도 논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달 8일 국무총리 소속 국가지식재산위원회에서 진행한 AI 저작권 관련 회의에서는 저작물의 AI 학습에 관한 내용이 심의·통과됐다. AI 학습 과정에서 저작물을 저장·처리할 때에는 권리자의 사전 허락을 받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앞서 문화체육관광부는 2월 AI 학습데이터 활용과 관련한 공정이용 판단 기준을 정리한 안내서를 내놓았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에 AI 특화 상담 및 분쟁조정 창구를 신설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문체부는 연내 AI 학습 목적의 저작물 양도·이용에 관한 표준 계약서를 배포할 예정이다. 다만 이번 앤트로픽의 사례처럼 글로벌 대형 AI 기업을 상대로 국내 저자들의 출판물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조금 더 적극적인 움직임이 요구된다.
현행 저작권법 틀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에도 면밀히 대비해야 한다고 출판업계는 보고 있다. 한 출판업계 관계자는 “기존 인간의 표절은 비교적 명확했지만 AI가 들어오면서 이런 표절은 더욱 절묘하고 복잡해졌다”며 “예를 들어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문체가 어느 실존 작가의 것과 똑같다든지 할 경우 구분하기도 처벌하기도 어렵다”고 우려했다. 만약 허구의 창작물을 학습한 AI가 가짜와 실제를 혼동해 사용자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할 경우 책임 소재도 논란이 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