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고정형 산업용 로봇에 맞춰진 안전 규제의 문턱을 낮추면서 휴머노이드의 제조 현장 투입이 본격화한다. 반도체 부품 세척부터 자동차 차체 부품 안착, 조선 기자재 적재까지 휴머노이드 20대가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실제 공정을 수행한다.
14일 관가에 따르면 산업통상부는 전날 ‘2026년 제6차 산업융합 규제특례심의위원회’를 열고 인공지능(AI)·로봇·에너지 분야 규제특례 안건을 심의했다. 위원회는 이족보행 휴머노이드 등을 개발하는 국내 로봇기업 로브로스가 신청한 ‘반도체·자동차·조선·물류 산업현장 휴머노이드 투입’ 사업에 실증특례를 부여했다.
이번 실증에서는 로브로스의 AI 기반 이족보행 휴머노이드 20대가 네패스와 성우하이텍, HD현대삼호, 딜리버리랩 등에 투입된다. 로봇은 작업자와 같거나 인접한 공간을 이동하면서 주변을 인식하고 물체를 집어 운반·적재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맡는 일도 단순 운반에 그치지 않는다. 네패스에서는 반도체 패키징 후공정에 쓰이는 원형 부품의 오염물을 제거하고 성우하이텍에서는 자동차 차체 부품을 정해진 위치에 안착시킨다. HD현대삼호에서는 선박 건조 때 고소작업 발판을 선체에 고정하는 구조물인 ‘족장피스’를 적재한다. 딜리버리랩에서는 냉장 물류포장체를 옮긴다. 작업 환경과 요구 정밀도가 서로 다른 4개 업종에서 휴머노이드가 실제 공정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휴머노이드의 강점은 기존 생산라인을 크게 손대지 않고 여러 공정에 투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고정된 위치에서 반복 작업을 수행하는 산업용 로봇과 달리 작업장을 이동하며 다양한 업무를 맡을 수 있어 공정 변화가 잦은 제조 현장에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 정부가 휴머노이드 육성에 나선 것도 제조업의 인력 부족에 대응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동시에 제조업의 인공지능 전환(M.AX)을 앞당길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례 적용 전 현행 제도에서는 산업용 로봇을 고정형으로 보고 안전펜스 등을 설치해 사람과 로봇의 작업 공간을 분리하도록 했다. 작업자 곁을 이동하며 세척·운반·적재 등을 수행하는 휴머노이드에는 적용하기 어려운 기준이었다.
정부는 그동안 기업이 규제샌드박스를 신청하면 개별 규제를 풀어주는 방식으로 대응해왔지만 AI·로봇 기술 변화가 빨라지면서 기업의 신청을 기다리지 않고 현장의 규제 쟁점을 선제적으로 발굴·정비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번 휴머노이드 특례도 그 일환으로, 위험성평가와 안전조치를 조건으로 현장 투입을 허용한 뒤 실증 데이터를 향후 안전기준 마련에 활용할 계획이다.
정부 지원도 기술 개발에 머물지 않고 실제 산업 현장 적용과 양산 기반을 만드는 쪽으로 확대되고 있다. 지난해 4월 ‘K-휴머노이드 연합’을 출범시킨 데 이어 올해는 AI 로봇 M.AX 얼라이언스를 중심으로 현장 실증을 늘리고 있다. 올 8월에는 2030년까지 휴머노이드 생태계에 누적 2조 3000억 원을 투자하고 핵심부품 국산화율을 80%까지 높이는 중장기 계획을 내놨다. 국산 휴머노이드도 누적 1080대를 정부가 구매해 초기 수요를 뒷받침할 계획이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AI 기술은 제도가 따라가기 벅찰 만큼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며 “기업이 새로운 기술을 산업 현장에 적용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제도적 병목을 신속히 걷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에서는 휴머노이드 경쟁이 이미 연구실을 넘어 생산라인으로 옮겨가고 있다. BMW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스파턴버그 공장에 피규어AI의 휴머노이드 ‘Figure 02’를 투입해 판금 부품을 용접 설비에 배치하는 작업을 맡겼다. 약 10개월 동안 9만 개가 넘는 부품을 처리하며 3만 대 이상의 BMW X3 생산에 참여했다.
중국도 대규모 제조 기반을 앞세워 현장 배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상하이시는 2028년까지 공장에 휴머노이드 8000대를 배치하고 선진 수준의 스마트공장 500곳, 제조업 AI 활용 사례 2000개 이상을 확보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국내 로봇산업은 선도국에 비해 현장 보급 규모와 산업 경쟁력에서 뒤처져 있다. 국제로봇연맹(IFR)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산업용 로봇 신규 설치 대수는 3만 200대로 중국(35만 4200대), 미국(3만 8400대), 일본(3만 6200대)에 못 미쳤다. 산업연구원이 평가한 제조용 로봇산업 종합 경쟁력도 72.9점으로 미국(80.6점)과 중국(79.4점) 등을 밑돌았다.
반면 반도체·자동차·조선 등 방대하고 복잡한 밸류체인을 갖춘 제조업은 한국이 격차를 좁힐 수 있는 강점으로 꼽힌다. 휴머노이드가 사람의 작업을 대신하려면 숙련공의 움직임과 공정 노하우 등 ‘행동 데이터’를 대규모로 학습해야 하는 만큼 국내 제조 현장 자체가 로봇의 학습 공간이 될 수 있어서다.
한재권 한양대학교 로봇공학과 교수는 “한국은 제조업 현장과 숙련공을 갖추고 있어 휴머노이드 실증에 유리한 여건을 갖고 있다”며 “실증을 확대해 숙련공의 움직임 같은 행동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