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외환시장에서 그동안 ‘원화 국제화’는 실현할 수 없는 꿈의 목표로 여겨졌다. 국제 금융결제 시장에서 원화의 존재감이 미미해 수요를 찾기 어렵다는 비관론이 우세했고 미국의 달러 패권도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 들어 이 같은 비관적 전망에 조금씩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우선 반도체 초호황의 여파로 글로벌 무역 시장에서 한국의 존재감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올해 세계국채지수(WGBI) 가입, 외환시장 24시간 개방 등 접근성 완화 조치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메모리 병목현상이 한국을 무시하기 어려운 나라로 만들었다”며 “국가의 힘이 세지면 통화의 위상도 달라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존재감 없는 통화였던 원화에 조금씩 근육이 붙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철통같았던 달러 패권에도 조금씩 이상기류가 일고 있다. 미국 뉴욕연방준비은행에 따르면 전 세계 중앙은행주의 외환보유액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5년 64%에서 지난해 56%로 8%포인트 감소했다. 중앙은행들이 달러 대신 다른 통화나 자산들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국과 갈등 관계에 있는 중국과 러시아가 이 같은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다. 미국의 만성적 재정적자도 달러 패권을 흔드는 요인 중 하나다. 당장 달러 패권이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일극 체제였던 전 세계 통화 체제가 다극 체제로 완만하게 이동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야간 외환 파생상품 거래가 늘어난 것은 원화 국제화에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동안 해외 투자자들은 서울 외환시장이 야간에 문을 닫을 때 실제 원화 거래 없이 달러로만 차익을 주고받아 환 헤지를 하는 역외 차액결제선물환(NDF) 시장에 의존했다. 이제는 24시간 개장에 따라 야간에도 실물인도선물환(DF) 및 외환스와프 거래를 국내시장에서 제약 없이 할 수 있게 되면서 실제 원화 수요를 넓힐 기반이 마련됐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여기서 머물지 말고 해외 투자자들이 자유롭게 언제든지 원화로 쉽게 거래·결제할 수 있도록 유동성을 확대할 후속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특히 글로벌 지정학적 갈등이 커지고 있어 원화의 국제적 영향력을 키울 종합적인 ‘커런시(currency) 플랜’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역외 NDF에 의존하던 수요가 국내 파생 거래로 흡수되면 환율 변동성도 낮출 수 있다. 앞서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는 야간 시간대 역외 NDF 거래가 현물환 환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상태(왝더독 현상)’라고 지적한 바 있다. NDF 거래량이 줄면 다음 날 환율이 비정상적으로 급등 혹은 급락하는 흐름이 감소할 확률이 높다고 외환 당국은 보고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단순히 NDF 수요를 역내 시장으로 흡수하는 것만으로 원화 국제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역내 파생 시장으로 거래 수요가 꾸준히 유입되고 해외 금융기관이 새벽 시간대에도 원화를 편하게 사고팔 수 있도록 유동성을 확충하고 거래 편의성을 높여야 한다고 조언한다.
실제로 외환 당국도 외환시장 24시간 개장에 이어 역외 원화 국제 결제망을 구축 중이며 NDF 거래를 DF로 전환했을 때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김한수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향후 원화 국제화의 초점은 제도 개방, 인프라 구축 자체보다 충분한 규모와 깊이를 갖춘 원화 유동성이 실제로 형성되는 데 둬야 한다”고 말했다.
시야를 더 넓혀 달러 중심의 국제통화 질서가 약화되고 있는 흐름에 맞춰 원화의 국제적 위상을 높일 마스터플랜을 마련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달러 지배력이 당장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주요국이 외환 보유 다변화 전략을 펼치고 있는 만큼 이 기회를 활용해 원화의 활동 반경을 넓힐 전략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재준 인하대 파이낸스경영학과 교수는 “중장기적으로는 해외 기업이나 금융기관이 원화를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넘어 수취한 원화를 보유·재사용할 유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한국 중심의 공급망 내 원화 결제를 확대하고 원화 무역금융과 원화 표시 금융자산 시장을 키우는 등 원화 사용의 네트워크 효과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