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을 활용한 금융권 해킹 사고가 잇따른 가운데 AI 에이전트의 신원과 거래 권한을 검증하는 기술로 블록체인이 주목받고 있다. 사람을 대신해 결제·송금 등을 수행하는 AI 에이전트에 일종의 ‘디지털 신분증’을 발급하고, 허용된 범위에서만 업무를 처리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11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홍콩에서는 금융당국 주도로 AI 에이전트의 신원을 확인하는 시범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홍콩 통신기업 HKT의 금융자회사 HKT페이먼트는 8월 금융당국의 ‘생성형AI 샌드박스(GenA.I Sandbox++)’참여사로 선정됐다. AI 에이전트가 이용자를 대신해 결제하거나 송금할 때 신원을 확인하는 ‘에이전틱 ID’를 시험할 계획이다.
HKT페이먼트는 블록체인 기술 기업 레드데이트테크놀로지와 손잡고 에이전틱 ID를 개발한다. 핵심은 AI 에이전트에도 사람처럼 디지털 신분증을 발급하는 것이다. 신원이 확인된 개인이나 기업과 AI 에이전트를 연결해 실제 누구를 대신해 금융거래를 수행하는지 증명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사칭이나 허가받지 않은 거래의 위험을 줄이겠다는 구상이다.
이 같은 기술이 필요한 이유는 기존 신원 확인 체계의 한계 때문이다. 금융사는 고객확인제도(KYC)를 통해 사람이나 기업의 신원을 확인한다. 그러나 고객의 신원이 확인됐다고 해서 해당 고객을 대신하는 AI 에이전트에도 거래 권한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AI 에이전트가 송금을 요청하면 금융사는 고객이 실제로 해당 에이전트에 송금 권한을 부여했는지, 어느 범위까지 거래를 허용했는지 별도로 확인해야 한다.
여러 기업이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도 블록체인의 장점으로 꼽힌다. 김서준 해시드 대표는 2월 해시드 공식 블로그를 통해 “서로 다른 기업의 AI 에이전트가 함께 활동하려면 특정 기업이 통제하지 않는 중립적인 신뢰 기반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블록체인을 활용하면 여러 기업이 공통된 체계에서 AI 에이전트의 신원과 평판, 업무 검증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라온시큐어가 관련 기술 개발에 나섰다. 라온시큐어는 4월 업스테이지와 협약을 맺고 AI 에이전트의 신원과 권한을 관리하는 ‘AAM(Agentic AI Management)’을 개발하고 있다. AI 에이전트마다 신원과 역할을 부여하고 허용된 업무만 수행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라온시큐어가 대한민국 모바일 신분증에 적용한 블록체인 기반 기술을 활용한다.
이더리움 생태계에서도 관련 표준안이 등장했다. 이더리움에서는 서로 다른 서비스가 같은 규칙에 따라 작동하도록 정한 기술 규격을 ‘ERC’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표준안인 ‘ERC-8004’는 AI 에이전트에 블록체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고유 식별자를 부여하고 이용자 평가와 검증 결과를 관리하도록 한다. 이더리움재단과 구글·코인베이스 관계자 등이 제안에 참여했다. AI 에이전트가 사용하는 가상화폐 지갑의 위험도를 평가하거나 거래 금액과 행동 범위를 제한하는 표준도 나왔다.
이러한 기술은 금융사가 신원이나 거래 권한이 확인되지 않은 AI 에이전트의 요청을 걸러내는 데 활용될 수 있다. 다만 AI를 이용한 외부 해킹 자체를 막는 것은 아니다. 신원이 확인된 AI 에이전트도 탈취되거나 악용될 수 있는 만큼 별도의 접근 통제와 거래 승인 절차가 필요하다.
신원과 권한 확인을 넘어 AI 에이전트의 활동 기록을 검증하는 기술도 개발되고 있다. 블록체인 개발사 미스틴랩스는 6일 구글 클라우드와 AI 에이전트 활동 검증 기술인 ‘VAA(Verifiable Agent Arbiter)’를 공동 개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AI 에이전트가 받은 지시와 실행 결과, 외부 도구 사용 내역 등은 기업이 관리하는 클라우드에 보관한다. 블록체인에는 해당 기록이 조작되지 않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증명 정보를 연결한다. 거래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AI 에이전트가 어떤 권한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 추적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미국 벤처캐피털 앤드리슨호로위츠(a16z)의 가상화폐 투자 부문인 a16z 크립토는 4월 보고서에서 AI 에이전트가 누구를 대신하고 어떤 권한을 가졌는지 증명할 수 있는 널리 통용되는 방식이 아직 없다고 지적했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면 AI 에이전트의 활동을 확인하기 어려운 ‘블랙박스’로 남겨두는 대신 검증 가능한 기록을 확보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