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전북 정읍에 위치한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 첨단방사선연구소 전자선 실증 연구동. 200keV(킬로전자볼트)급 저에너지 전자가속기와 연결된 호스를 열자 작은 공간에 악취가 순식간에 퍼졌다. 전날 축산 농가에서 가져온 우분(소똥)에서 발생한 냄새였다. 하지만 이 냄새는 전자가속기가 작동하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호스 가까이에서 약간의 비릿한 냄새가 느껴졌지만 불과 몇 초 전까지 코를 찌르던 소똥 냄새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악취를 없앤 것은 방사선의 일종인 ‘전자선’이다. 전자선이 소똥에 포함된 악취 원인 물질의 분자구조를 변화시켜 냄새를 제거한 것이다. 전자선은 전자총에서 발생시킨 전자를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해 물질에 쏘는 방사선으로 물질 내부의 분자구조를 변화시키거나 미생물을 사멸시키는 데 활용할 수 있다. KAERI 실증 결과 악취 물질에 전자선을 조사하자 4만 4814OU(오유)였던 악취 농도는 100OU까지 떨어져 99% 이상 감소했다. OU(Odor Unit)는 냄새를 사람이 감지하지 못할 정도까지 희석하는 데 필요한 배수를 나타내는 악취 단위다.
김병남 방사선융합연구부 책임 연구원은 “전자가속기 기반 악취 제거 기술을 이용하면 한 해에 3만 건 이상의 민원이 발생하는 악취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며 “최근 화생방 유기 유도체 실험에서도 냄새가 99% 제거되는 것으로 나타나 향후 국방 분야에서도 이 기술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냄새 제거를 위해 쓰이는 고분자 필터는 시간이 지나면 성능이 떨어져 정기적으로 갈아 끼워야 하는데 방사선을 이용하면 운영비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KAERI의 설명이다.
전자가속기는 악취 제거뿐만 아니라 문화재 복원, 배터리·반도체·우주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도 쓰이고 있다. 물질의 분자구조를 바꾸거나 분자 사슬을 끊는 방사선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실제로 KAERI는 2024년 서울역사박물관과의 공동 작업을 통해 서울시 유형 문화재 제177호인 관서명승도첩을 완벽히 복원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당시 연구진은 관서명승도첩이 그려진 기존 비단과 새 비단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2.5MeV(메가전자볼트) 전자가속기로 새 비단을 인위적으로 낡게 만든 후 그림과 합치는 방식으로 복원했다.
그 결과 입수 당시 앞뒤를 관통하는 1~2㎜(밀리미터) 크기의 작은 구멍이 수백 개 뚫려 있을 정도로 벌레에 의한 손상이 심각했던 관서명승도첩은 1년 6개월 만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됐다. 이는 일본산 전자선 열화 비단 수입에 의존하지 않고 국내 제조 열화 비단으로 문화유산 보존 처리를 한 최초 사례이기도 하다. KAERI는 고려시대 불화인 미황사 영산회상도 보존 처리도 마쳤으며 비단 이외에 삼베·마 등 다른 전자빔을 이용한 장황 소재 국산화에도 성공했다.
세계에 단 2개뿐인 10MeV급 고에너지 전자가속기는 목조 문화유산 복원에 사용할 대형 원목을 소독하거나 풍력발전기·전선·배터리 등의 가교를 유도하는 데 쓰이고 있다. 전자선은 물체의 고분자 사슬을 연결해 그물처럼 만드는 가교 반응도 일으키기 때문이다. 가교가 이뤄지면 고분자의 강도와 내열성·내구성 등이 높아져 불이 잘 붙지 않는 고성능 부품이 된다. 윤진문 방사선융합연구부 책임 연구원은 “전자선 실증 연구동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저·중·고에너지 전자가속기 3기와 에너지별 자동화 설비를 한 곳에 갖춘 곳”이라며 “특히 고에너지 전자가속기를 이용하면 길이가 11m에 달하는 풍력발전기 블레이드(날개)에도 전자선을 조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자선은 최근 전고체 배터리 개발, 원자 단위 백금 촉매 개발, 전자선 기반 육종 기술 등 첨단 기술 분야와 우주 분야로도 활용 범주가 넓어지고 있다. 전고체 배터리의 경우 전자선을 활용하면 배터리 안쪽까지 열을 고르게 전달할 수 있다. 액체 상태의 전해질에 열을 가해 고체로 만들면 배터리 표면에는 열이 많이 전달되고 안쪽은 비교적 덜 전달돼 배터리 밀도가 균일하지 못하다는 문제가 있는데 전자선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 셈이다. 정병엽 KAERI 첨단방사선연구소장은 “배터리 밀도가 균일하지 않으면 표면은 딱딱하고 안쪽은 물렁해 전류 흐름이 일정하지 못하게 되고 이로 인해 상용화가 어렵다”며 “전자선을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LG에너지솔루션 등과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KAERI는 우주에서도 고장 없이 쓸 수 있는 내방사선 반도체도 개발 중이다. 우주로 간 위성이 먹통이 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우주에 가득 찬 방사선에 의해 반도체가 망가지는 탓이기 때문이다. 정 소장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과 함께 방사선에 잘 견디는 국방·항공·미래 모빌리티용 내방사선 반도체 칩 및 센서 핵심 기술을 개발 중”이라며 “우주용 반도체는 일반 반도체보다 가격이 최대 1000배 더 비싸 개발된다면 높은 부가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정 소장은 이를 위해서는 내방사선 반도체의 성능을 평가할 환경도 제대로 갖춰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2029년까지 내방사선 반도체를 개발해도 개발한 제품이 실제로 내방사화 됐는지를 검증할 수 있는 시설이 현재 국내에 없는 상황”이라며 “미국에서 하려면 하루에 1억 3000만 원이 필요하고 시간도 많이 주지 않아 기술이 발전하기가 어려워 국내에 우주 방사선 테스트베드 구축을 위한 용역 사업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