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가 텍사스 엔시날 액화천연가스(LNG) 복합화력발전소와 미국 원전 프로젝트를 대미 전략투자 사업으로 본격 추진하기로 했다. 알래스카 LNG 사업은 일단 투자 목록에 올랐지만 미국은 한국이 500억 달러 이상 투자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반면 정부는 투자 규모와 세부 내용을 추가 협상하겠다는 방침이다. 1500억 달러 규모의 한미 조선 협력 프로젝트인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위대하게)’는 한미간 다음 집중 협상 의제가 될 전망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30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의 공식 집무실에서 이같은 내용이 담긴 한미 간 대미 전략투자 합의 내용을 발표했다. 22일 정부가 국회에 대미 사업 추진 계획을 보고한지 9일 만이다. 대미 투자 사업의 선언 권한은 미국 대통령에게 있어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해야 공식화 된다.
정부는 이번 협의에서 다양한 투자 안전장치를 확보했다. 한미는 기존에 합의한 전략 투자 규모(2000억 달러)와 연간 송금액(200억 달러) 상한을 넘기지 않도록 하는 조항을 법적 구속력이 있는 운영 계약에 명시하기로 했다. 개별 사업 사업비가 늘어도 전체 송금 부담은 가중되지 않도록 하는 안전장치다. 뿐만 아니라 전체 투자 원리금이 회수될 때까지 모든 사업의 수익 배분을 5대5로 유지하기로 해 ‘리스크 풀링’ 기능도강화했다.
미국 정부가 당초 알려졌던 합의 내용과 달리 한국의 알래스카 LNG 투자를 못박으면서도 구체적으로 투자 규모를 ‘500억 달러 이상’으로 언급한 것도 이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미 텍사스 엔시날 LNG 복합화력발전소 223억 달러와 대형 원전 8기에 필요한 1200억 달러를 더하면 1423억 달러의 투자가 확정돼 남은 한도가 577억 달러여서다. 사실상 남아있는 투자 한도 전부에 가까운 금액을 알래스카 LNG 사업에 쏟아부으라고 압박하는 셈이다. 알래스카 LNG 사업은 최대 670억 달러 이상 필요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정부는 알래스카 LNG 사업 투자는 신중하게 접근하겠다는 입장이다. 앞서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22일 대미 투자 보고 국회 보고를 마친 뒤 기자들을 만나 알래스카 LNG 사업에 대해 “비용을 그대로 수용하면 한도를 초과할 수 있기 때문에 알래스카 LNG 사업은 규모를 줄여 다시 제시해달라고 미국에 요청했다”며 “상업적으로 받을 만하고 전략적으로도 우리 이익에 도움 될 수 있도록 치열하게 논쟁해보겠다”고 설명했다.
알래스카 LNG 사업는 북부 노스슬로프 유전과 남부 해안 니키스키를 잇는 1300㎞의 가스관과 수출용 액화 터미널을 함께 건설하는 인프라 사업이다. 인구가 희박해 근로자를 구하기 어렵고 지반이 불안정한 극지방에 대규모 파이프라인을 건설해야 해 공사 난이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에 업계에서는 LNG 가격이 치솟지 않는 한 상업적 합리성을 확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돼왔다.
이에 양국은 사업을 진행하게 되더라도 상업적 합리성을 높이기 위해 미국은 다양한 혜택을 한국 측에 제공하기로 했다. 한국 기자재 공급 업체에 우호적인 여건을 조성해주고 철강 등이 포함된 기자재에 대한 관세를 인하해 주는 식이다. 또 경제성 있는 조건의 장기 LNG 구매 계약을 체결해 알래스카에서 생산된 LNG에 대한 한국의 우선적 접근권을 보장한다. 산업부는 알래스카 주정부 차원에서 제공하는 각종 인센티브 등도 사업성을 끌어올리는 요소로 보고 있다.
이렇게 상업적 합리성이 확보될 경우 알래스카 LNG 사업은 몇몇 핵심 수송로에 의존하고 있는 LNG 공급망을 다변화 하는데 기여 할 수도 있다는 것이 산업부의 계산이다. 현재 카타르산은 호르무즈해협을, 호주·말레이시아산은 남중국해와 대만 해협을, 미국산은 파나마 운하를 건너야 하는 등 주요 해상 병목에 수송로가 몰려있다. 반면 알래스카산의 수입선은 광활한 서태평양이어서 막힐 위험이 거의 없다는 장점이 있다. 김 장관 역시 “현재 LNG 수입 노선을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취약하다. 그래서 (대체 수입선을) 전략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알래스카 LNG 사업 이후에는 핵심 광물 등 공급망 안보 분야에 투자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김 장관은 “한도에 10억~20억 달러의 여유라도 남는다면 핵심 광물 등 규모는 작더라도 양국의 전략적 이익에 부합하는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추가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수익성이 다소 낮더라도 한미의 전략적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사업을 발굴해 내겠다는 취지다.
20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의 상당부분이 합의되면서 이제 마스가 협상이 본격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번 협상에서는 1500억 달러에 달하는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위대하게) 관련 논의가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순 발주액이나 선박금융까지 마스가 투자액에 포함되는지, 우리 기업들이 미국 조선소 부흥에 어느 정도 개입해야 하는지 등이 쟁점이다. 김 장관은 “이제 대미 투자 논의가 한 판 끝났고 이제 다음 판은 마스가”라고 말했다. 실제 이재명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간) 뉴욕에서 열린 깜짝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군함 건조를 포함한 조선 분야 협력이 주요 의제였다고 소개한 바 있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발표는 정부가 국회에 해당 내용을 보고한지 9일이 지나 이뤄졌다. 그동안 미국이 한국에 빠른 투자를 독촉해왔던 것을 감안하면 예상 밖 결과다. 한국 측 절차가 마무리된 시점에 미국에선 유엔 총회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미국 국빈 방문 등 굵직한 외교 일정이 겹치면서 미국 내부 절차가 지연된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한미 양국이 체결한 대미 투자 관련 양해각서(MOU)는 “미 합중국 대통령이 투자의 최종 결정권한을 갖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최종 선정 전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투자위원회의 사업 추천을 받아야 한다. 이 투자위원회는 한국과 직접 또는 김 장관이 위원장인 협의위원회를 통해 한국과 사업을 협의해야 한다. 정부가 국회 보고로 국내 절차를 끝내도 미국 측의 행정 절차를 거쳐야 대미 투자 사업이 최종 확정되는 구조라는 이야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