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기술 경쟁은 치열해지는데 수십 년간 경험과 암묵지를 쌓은 연구자들은 퇴직과 함께 현장을 떠난다. 반면 연구자의 도움이 필요한 중소기업은 적합한 전문가를 찾기 어렵다. 정부가 고경력 과학기술인 활용을 위한 전문기관을 지정해 내년부터 운영할 예정이어서 관심이 쏠린다. 은퇴 과학기술인의 경험을 산업 현장에 연결하려면 연구자의 경력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협력에 필요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선화 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원장은 29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첨단기술을 연구해 온 연구자라도 정년을 맞으면 현장을 떠나는 게 일반적”이라며 “고경력 과학기술인의 경험은 국가전략자산으로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전산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KISTI에서 원장을 역임할 때 연구자와 기업이 필요한 데이터와 컴퓨팅 자원을 공유하는 오픈사이언스를 강조했다. 이후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정책본부장을 거쳐 지난해 말까지 KISTI 전문연구위원으로 활동할 때 2년간 주 2회 빅데이터 분석 벤처기업에 데이터커뮤니케이터로 근무하며 수학적 방법으로 데이터 품질을 측정하고 중복과 편향 등을 평가했다. 현재는 NST 이사와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명예교수로 활동하며 국가 연구개발(R&D) 정책 자문과 과제 평가, 강의 등을 맡고 있다.
첨단 전략기술 경쟁이 격화하고 학령인구 감소로 연구 인력 부족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수십 년간 축적된 연구자의 암묵지와 시행착오의 경험은 대체하기 어려운 자산으로 꼽힌다. 정부출연연구원의 경우 박사학위를 받고 입사한 연구자 한 명에게 퇴직할 때까지 급여를 포함해 투자되는 비용이 총 300억 원가량으로 추산된다. 한 전 원장은 “이들의 성공과 실패 경험, 조직 안팎에서 쌓은 협업 경험과 국내외 네트워크는 논문이나 특허에 모두 남지 않고 후배에게 단기간에 전해지기도 어렵다”며 “중소·딥테크 기업의 기술적 병목을 푸는 데 인공지능(AI)이 이를 대신할 수도 없다”고 설명했다. 이들의 전문성을 사장시키는 것은 국가 R&D 투자의 누수이며, 기술주권의 관점에서도 시급히 바꿔야 할 문제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고경력 과학기술인과 기업 현장 사이에는 정보 비대칭이 커 협력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 중소기업은 공정 수율을 높이거나 핵심기술을 개발하고 싶어도 이를 R&D 언어로 정확히 정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 고경력자는 연구 과제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기존 고경력자 활용 사업도 부처와 기관별로 멘토링·강연·단기 자문 등에 소규모 예산이 나뉘어 있어 지속적인 문제 해결을 원하는 기업의 수요를 충족하기 어렵다.
기업은 퇴직 전문가를 시간제로 활용하려 해도 처우 기준과 보안 관련 책임이 불분명해 주저한다. 전문가 역시 저임금의 일회성 일자리에 꾸준히 참여할 유인이 부족하다. 한 전 원장은 “직접 벤처기업에 파견 근무해보니 여러 요인으로 과학기술인과 벤처기업간 시너지 효과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절감했다”며 기업의 고경력 과학기술인 활용에 대한 치밀한 접근을 주문했다.
그는 지난 5월 국가과학기술 경쟁력 강화를 위한 이공계지원 특별법 개정에 따라 내년부터 고경력 과학기술인 활용을 위한 전문기관이 운영될 예정인 만큼, 해당 기관이 사업 집행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현직 연구자와 퇴직자의 정보를 연계하고 흩어진 지원사업을 조정하는 한편, 전문가 역량 검증과 계약 기준 마련, 분쟁 조정까지 맡는 구심점이 돼야 한다는 제언이다. 그는 “먼저 통합 정보 기반을 구축하고 전문가의 법적 지위와 대우, 의무사항 등을 담은 표준 계약서를 마련해야 한다”며 “성과 역시 자문 횟수나 보고서 건수보다 공정 개선, 불량률 감소, 기술이전, 기업 매출과 후배 연구자 멘토링 성과로 평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문기관은 현재 고경력 과학기술인과 기업을 연결하는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와 출연연의 구심점인 NST를 함께 지정하는 방안이 효과적이라고 제시했다.
퇴직 연구자와 기업의 간극을 메울 ‘기술 코디네이터’도 제안했다. 고경력 전문가가 최소 2~3년간 기업에 참여해 기술적 병목을 해소하고 시제품 제작부터 양산, 수율 안정화까지 이어지도록 돕자는 구상이다. 피지컬 AI·이차전지·바이오·방산·소재·부품·장비 분야의 기업을 밀착 지원하는 일종의 ‘기술주치의’인 셈이다. 기업에 적합한 전문가를 찾는 데 AI를 활용하되 학력·출신 기관·연령에 따른 편향을 줄이고 개인정보를 보호할 장치도 갖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연구자에게는 최소 퇴직 3~5년 전부터 산업계의 언어와 기술 사업화에 필요한 지식을 익힐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는 기업이 고경력자를 활용하는 초기에는 비용을 전액 지원하되, 성과에 따라 기업의 부담을 늘려가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는 “논문 수와 특허, 근무 기관 위주로 사람을 골라서는 안 된다”며 “장비를 다뤄온 노하우와 산학협력 경험, 위기 극복 사례, 프로젝트 관리 경험 등이 외려 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전 원장은 “고경력 과학기술인을 활용한다는 명제만 앞세워 자칫 시혜성 프로젝트로 흐르면 공공근로사업과 다름없게 될 것”이라며 “고경력자를 벤처·스타트업과 지역 중소기업을 키우는 촉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정교한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