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과세수 규모가 60조 원을 넘길 것으로 전망되면서 우리 정부 경제팀에 ‘트릴레마(세 가지 정책과제가 서로 충돌하는 상황)’ 난제가 주어졌다. 초과세수를 바탕으로 확장재정 정책에 속도를 낼 경우 경제성장에는 유리하지만 물가를 잡기 위해 긴축에 들어선 한국은행과는 모순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최근 전 세계에서 국채금리가 급등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재정 방파제부터 더 튼튼하게 쌓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전문가들은 현재 우리 경제가 확장 사이클 위에 있는 만큼 초과세수의 지출 속도를 조절하고 일부를 채무 상환 등에 적극 활용하는 등 정교한 ‘폴리시믹스’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당장 물가가 가장 큰 부담이다. 8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월보다 3.1% 상승했다. 식료품·에너지를 제외한 근원물가 상승률은 3.4%에 이른다. 김우철 한국재정학회장은 27일 “한은은 금리를 올리고 있는데 정부는 반대로 재정을 크게 확대하고 있다”며 “재정이 풀리면서 총수요를 다시 자극하면 한은이 지금까지 금리를 올린 효과를 덮어버릴 수 있다”고 말했다. 물가가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하면 한은이 ‘원하지 않는’ 추가 금리 인상에 나설 수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60조 원에 이르는 초과세수를 어디다 쓰느냐도 관건이다. 현행 국가재정법은 초과세수를 이미 발행한 세입 보전 국채 상환에 활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개정안은 미래대응기금 전출도 허용했다. 이론적으로 빚을 갚는 대신 미래대응기금에 넣어 확장재정에 쓰일 수도 있다는 의미다.
내년 미래대응기금은 2027년 내국세 세입예산 가운데 최근 10년 추세선을 웃도는 ‘추가세수’를 중심으로 162조 3000억 원 규모로 출범한다. 여기에 별개 개념인 올해 ‘초과세수’ 60조 원 이상이 전액 넘어갈 경우 산술적으로 기금 재원은 222조 원 이상까지 커질 수 있다. 정부는 다만 초과세수가 기금에 전입되더라도 곧바로 세출 사업으로 풀리지는 않는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여유 재원으로 쌓인다고 향후 지출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재원이 두꺼워질수록 사업 확대나 신규 편성을 뒷받침할 여력이 커지고 이를 실제 지출로 돌리려는 압력도 높아질 수밖에 없어서다. 정부안은 미래대응기금의 주요 항목 지출 금액을 30% 이하 범위에서 별도의 기금운용계획변경안을 국회에 제출하지 않고 조정할 수 있도록 해 일반 비금융성 기금의 20%보다 운용 폭도 넓혔다. 특히 지방계정 국고보조사업비는 불가피한 사유로 집행하지 못하더라도 최장 3년까지 이월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기금 운용의 재량이 커지는 만큼 국회의 통제 약화 우려도 제기된다.
김 회장이 미래대응기금 140개 세부 사업을 자체 분류한 결과 사업비 45조 3600억 원 가운데 자본 형성과 인적 자본 투자는 19조 100억 원으로 41.9%에 그쳤다. 미래 성장 기반을 넓히는 성격의 지출이 절반에 못 미친 셈이다. 농어촌기본소득과 아동기본수당·청년문화예술패스 등 경상이전·현금·바우처 성격의 사업은 8조 9600억 원으로 19.8%를 차지했다. 이런 지출은 인공지능(AI), 전력망, 연구개발(R&D) 등 공급 확충형 투자보다 단기적으로 총수요를 끌어올리는 효과가 상대적으로 크다.
박준우 하나증권 연구원은 “경기 확장 국면에서 초과세수를 재원으로 지출을 확대하는 것은 전형적인 경기 순응적 재정정책”이라며 “승수가 낮더라도 방향은 경기 과열과 물가 압력을 자극하는 쪽”이라고 지적했다. 국고채 10년물 금리가 최근 4% 중반까지 오른 상황에서 재정 확대가 성장·물가 전망을 높이면 장기금리의 하락을 제약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호황기에 일시적으로 늘어난 세수를 곧바로 지출 확대에 쓰기보다 채무 상환이나 여유 재원으로 남겨두고 경기 둔화기에는 이를 활용하는 식의 재정 운용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한은이 금리를 올리는 국면에서는 재정도 총수요를 더 자극하지 않도록 지출 속도를 조절해 재정과 통화정책의 강도를 맞추는 ‘폴리시믹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원칙이 작동하려면 언제, 얼마를 적립하고 인출할지 기준을 미리 정해야 한다. 미래대응기금은 경기·세수 상황에 따른 객관적인 인출 요건이나 재적립 의무 등이 충분히 구체화돼 있지 않다.
해외의 경우 아일랜드는 미래 세대 장기 저축과 단기 충격 대응, 국내 전략 투자를 별도 기금으로 나누고 칠레는 경기와 구리 가격 등 추세 변수를 토대로 적립·인출 기준을 정해두고 있다. 한국은 재정 안정화와 전략 투자를 한 기금에 담은 만큼 여유 재원을 사업비로 돌리는 조건과 한도를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통화 긴축으로 내수가 크게 위축될 때는 재정이 보완적인 역할을 할 필요도 있지만 지금은 금리를 큰 폭으로 올려야 할 상황은 아니라고 본다”며 “이런 상황에서 재정까지 과도하게 확대하면 유동성과 금리 상승 압력이 함께 커지고 이자 부담 증가로 소비와 투자가 위축될 수 있다. 결국 경기와 물가, 금융 안정을 함께 보면서 재정과 통화정책이 지나치게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도록 조합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