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계획으로 대만 TSMC의 반도체 공정 속도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TSMC는 대만 타이중과 가오슝 등의 팹을 중심으로 첨단 반도체 제조와 패키징·장비·소재 등 관련 산업을 촘촘하게 연결한 생태계를 구축했다. 가오슝은 수도 타이베이에서 300km 이상 떨어진 외곽인데 TSMC의 첨단공정 추진역량과 대만 정부의 행정 지원에 힘입어 반도체 클러스터로 거듭나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은호 고려대 경제기술안보연구원 경제안보센터장은 최근 서울 성북구 연구실에서 진행한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대만 반도체 산업의 중심에는 40년 장기집권한 모리스 창의 ‘칩 리더십’이 있었다”고 전했다. TSMC 설립자 모리스 창 회장은 세계 최초로 반도체 설계와 제조를 분리해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들이 생산을 맡길 수 있도록 하는 순수 파운드리라는 개념을 사업화했다. TSMC의 성공은 세계 반도체 시장의 생산방식을 분업 구조로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이 센터장은 “모리스 창 회장은 2005년 릭 차이 최고경영자(CEO)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고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자 다시 일선으로 복귀해 TSMC를 이끌었다”며 “이 과정에서 단순 반도체 제조기업이던 TSMC는 애플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등 첨단 칩 시장을 주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전했다.
이 센터장은 서울대 기계설계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아 공대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공학자이다. 자동화기술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공업진흥청으로 공직에 입문해 청와대 지식경제비서관실 행정관과 산자부 산하 전략물자관리원장 등을 지냈다. 지난해 7월까지 차관급인 주 타이베이 한국 대표를 지낸 그는 모리스 창 회장과 4차례 단독 면담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 센터장은 대만 반도체 산업의 성장 배경으로 TSMC를 중심으로 구축된 산업 네트워크를 꼽았다. TSMC를 중심으로 관련 기업들이 함께 성장하는 산업 생태계를 만든 것이 대만 반도체 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대만의 수많은 기업은 지난 수십 년간 TSMC와 성장을 함께하며 공조 체계를 갖춰왔다”며 “TSMC는 반도체 주문부터 생산까지 통상 6개월이 걸리는 과정을 1개월로 단축하고, 품질도 개선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반도체 강국인 대만과 한국이 경쟁 관계가 아닌 상호보완적 관계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TSMC가 파운드리 분야에서 절대 강자인 것과 달리 한국이 강점을 보이는 메모리 시장은 중국·미국 기업의 추격을 받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등 중국 반도체 기업들의 부상에 이어 미국 마이크론은 대만을 통한 고급 메모리 생산 역량을 강화하면서 반도체 공급망 변화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며 “이러한 시장 변화는 한국이 대만과의 협력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필요성을 높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팹리스 업체들의 공급 단가 인하 압박이 머지않은 미래에 나타날 것”이라며 “한국과 대만 반도체 기업이 AI 반도체 시장에 생산물량 조절 등을 통해 공동 대응해야 할 필요성도 커졌다”고 덧붙였다.
반도체 원재료 공급망 협력의 필요성도 언급했다. 최근 이란 전쟁 여파와 중국의 수출 금지로 반도체 제조 공정의 필수 원자재인 헬륨 부족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그는 “미·중 간의 첨단 반도체와 핵심광물 패권 분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양국이 차세대 반도체 제조기술뿐 아니라 반도체 필수소재인 헬륨, 희토류 등 중요 원자재 대체재 개발에 나서야 한다”며 “산유국 협의체인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대항해 석유소비국 연합체인 국제에너지기구(IEA)가 탄생했듯이 반도체 분야에서도 생산국 간 협력이 필요해졌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추진 중인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사업에 대해서는 대만처럼 기업 부담을 줄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센터장은 “한국은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공단을 조성해서 기업에 땅을 분양하는데, 대만은 무료로 땅을 빌려주고 관리비만 받는 구조”라며 “기업 입장에서는 초기투자비용이 크게 절약되는 것은 물론 특례를 적용해 법인세 실효세율이 크게 낮아지는 이점이 있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