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국가배상 소송에서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패소 확정판결을 받았더라도 개정 과거사정리법이 시행 전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로부터 진실규명 결정을 받았다면 다시 같은 소송을 낼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은 해당 규정이 법 시행 당시 진행 중인 재판에도 적용된다는 법리를 처음으로 제시했다.
대법원 3부(주심 오석준 대법관)는 23일 A 씨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대구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
A 씨는 한국전쟁 직전인 1949년 경찰의 좌익세력 소탕작전 일환으로 어떠한 재판 절차도 없이 총살됐다. A 씨 유족은 2012년께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으나 패소가 확정됐다. 당시 재판부는 국가가 불법행위에 대한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판단했다. 국가재정법상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는 원칙적으로 불법행위 시점으로부터 5년이다.
이후 진실화해위는 2023년 8월 “경북 영덕 군경이 좌익활동 또는 빨치산에게 협조했다는 혐의 등을 이유로 A 씨 등 민간인 20명을 적법절차 없이 살해한 행위는 불법”이라는 진실규명 결정을 했다. A 씨 유족은 이 결정에 근거해 국가를 상대로 재차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소송의 쟁점은 패소가 확정된 선행소송의 기판력이 이 사건에도 미치는지였다. 기판력은 앞서 확정된 판결의 쟁점과 내용에 대해 추후 다른 소송에서 다툴 수 없도록 하는 소송법상 효력이다.
2024년 4월 선고된 1심과 지난해 5월 선고된 2심은 모두 선행 소송 판결의 기판력이 있다는 이유로 A 씨 유족 패소로 판결했다.
하지만 사건이 대법원에서 심리 중인 올해 2월 과거사정리법이 전면 개정·시행됐다. 대법원은 해당 법에 근거해 원심을 뒤집고 유족 측 손을 들어줬다.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사건은 장기 소멸시효 적용을 받지 않고, 법 시행 전 진실규명 결정을 받거나 소멸시효 완성을 이유로 소송에서 패소한 사람도 법 시행일부터 3년 이내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특례 규정이 새로 들어갔다.
대법원은 “개정 과거사정리법 취지는 과거사 사건에서 국가가 과거 반민주적·반인권적 행위의 희생자와 피해자에 대한 배상이 철저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 반성의 토대 위에서, 장기 소멸시효기간을 배제하거나 스스로 시효이익을 포기하고 피해자가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새로이 제기하더라도 소멸시효 완성을 이유로 한 패소 확정 판결의 기판력이 미치지 않도록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이어 “개정 과거사정리법 시행 이전 진실규명 결정이 이뤄졌다면, 비록 소멸시효 완성을 이유로 한 청구기각 판결이 확정됐더라도 피해자는 이전 소송과 상관없이 법 시행일로부터 3년 이내 다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며 “이는 개정 과거사정리법 시행 이전에 이미 손해배상청구 소송이 제기돼 개정 과거사정리법 시행 당시 소송 계속 중인 사건에 대해서도 동일하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원고들은 개정 과거사정리법에 의해 손해배상을 다시 청구할 수 있으므로, 앞선 확정 판결의 기판력이 미친다고 판단한 원심 판결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