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원전인 APR-1400이 과거 웨스팅하우스와 체결한 ‘불평등 계약’의 족쇄를 벗고 대미 투자 대상에 포함되면서 우리 원전 생태계가 제2의 도약에 나설 수 있게 됐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미 경제성과 안정성 측면에서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APR-1400이 아랍에미리트(UAE)에 이어 미국 수출이력까지 확보하면 사우디아라비아나 베트남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주전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23일 원전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22일 국회에 이 같은 내용의 ‘대미투자 원전 프레임워크’를 보고했다. 그동안 한전·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의 비공개 계약에 따라 한국 원전은 미국에 진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대미 투자금으로 건설하는 사업에 한해 제약을 풀기로 한 것이 프레임워크의 핵심 내용이다. 현재 일본 히타치와 미국 GE가 개발한 ESBWR 노형의 공급망이 붕괴된 탓에 미국에서 대형 원전을 지으려는 사업자로서는 웨스팅하우스의 AP-1000 외에 선택지가 없었는데 여기에 APR-1400이라는 대체재가 추가된 셈이다.
원자력 학회장을 맡고 있는 최성민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는 “일회성 수출이 아니라 규모가 상당한 미국 원전 시장에 APR-1400을 추가 건설할 교두보가 될 수 있어 의미가 상당하다”고 평가했다.
한국의 APR-1400과 AP-1000 두 모델의 규격은 큰 틀에서 비슷하다. 두 노형 모두 150기압 이상으로 압축한 물을 냉각재로 활용하는 가압경수로(PWR)다. 물의 끓는점을 높여 냉각수가 기화하지 않고 계속 원자로를 식히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터빈을 돌리는 증기가 원자로와 직접 접촉하지 않아 방사능 유출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 둘 다 설계 수명이 60년에 달하고 18개월에 한 번씩 핵연료를 교체하기 위한 예방정비를 해야 한다. 한국이 고리1호기를 지을 때부터 미국으로부터 기술을 배운 탓에 발생한 유사성이다.
다만 얼마나 많은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지를 의미하는 설비용량은 APR-1400이 1.4GW(기가와트)로 AP-1000(1~1.1GW)보다 더 크다. 차지하는 부지도 비슷하고 건설 기간도 유사한데 발전량이 30~40% 더 많은 셈이다. 원전 업계의 한 관계자는 “체코 두코바니원전이 발전 용량이 1GW인 APR-1000을 택한 것도 전력 수요가 작은 시장이기 때문”이라며 “수요만 충분하다면 대용량 발전원을 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열효율이 좋다는 특징도 있다. APR-1400을 가동했을 때 발생하는 열출력은 3983㎿t(메가와트톤)으로 AP-1000의 열출력 3415㎿t 대비 16.6%가량 많다. 핵분열을 통해 얻는 열은 16% 더 많은데 실제 발전은 40%까지 더 할 수 있을 정도로 효율이 뛰어나다는 의미다.
무엇보다 건설 과정에서 안정적인 공급망 생태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APR-1400의 강점이다. 미국은 제조업 기반이 약화한 데다 웨스팅하우스 역시 설계 전문 기업이어서 원전 건설 사업을 수주할 때마다 자재 수급 공급망을 새로 짜야 한다. 원전에 납품하는 자재들은 단순한 파이프라도 상당히 까다로운 품질 검증을 받아야 해 상당한 기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미국 정부가 원전 산업 부흥을 추진하면서 부지가 확정되기도 전에 175억 달러 규모의 부품 발주용 대출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것도 이 같은 점을 염두에 둔 조치다.
이와 달리 APR-1400은 이미 국내외에서 꾸준히 건설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운용·정비 과정에서 필요한 부품을 국내에서 조달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원전의 3대 핵심 기자재로 불리는 △냉각재펌프(RCP) △증기발생기 △계측제어시스템(MMIS)은 물론 터빈까지 국산화에 성공해 효율적으로 건설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최 교수는 “한국은 국내외에서 APR-1400을 중심으로 설계·시공 역량과 공급망을 착실히 축적해왔다”며 “미국으로서도 원전을 빠르게 건설하려면 한국과 손잡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산업 기반 하나 없는 UAE 사막에서 과도한 공기 지연 없이 4기에 달하는 원전 건설을 마무리했다는 점도 발주자들의 이목을 끄는 이력이다.
이렇다 보니 ‘팀 코리아’가 건설하는 원전의 단가는 경쟁국에 비해 압도적으로 싼 것으로 알려졌다. 원전 건설 단가는 부지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축적된 노하우와 탄탄한 공급망으로 납품 단가가 낮고 공기가 짧은 덕에 어디에서든 한국이 더 낮은 값을 제시할 수 있다는 의미다. 가령 지난해 최종 계약까지 체결한 체코 두코바니원전 수주전 당시 한국이 제시한 1㎾(킬로와트)당 건설 단가는 경쟁자인 프랑스전력공사(EDF) 대비 30%가량 낮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수주전 당시 한수원이 제시한 가격이 너무 낮아 프랑스 측에서 원가 이하의 가격을 무리하게 제시한 것 아니냐고 의심했을 정도”라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