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과 한화가 공정거래위원회 조사에 맞서 제기한 집행정지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인 데 대해 주병기 공정위원장이 이례적으로 공개 유감을 표명했다. 주 위원장은 기업들이 공정위 조사를 회피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도록 내부 규칙과 관련 제도를 손질하겠다고 밝혔다.
주 위원장은 2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취임 1주년 출입기자단 간담회에서 서울고법이 쿠팡의 현장조사 결정과 한화의 자료제출 명령에 대한 효력정지 신청을 각각 인용한 것과 관련해 “굉장히 유감”이라며 “공정위 조사 관련 내부 규칙을 다시 한번 돌아보면서 조사 회피 여지를 분명하게 없애는 방식의 개정을 살펴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공정위 현장조사 결정의 효력이 법원 판단으로 정지되면서 조사가 약 한 달간 유보된 것을 두고 주 위원장은 “실질적으로 저희 조사의 실효성은 무력화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대부분의 공정위 관련법은 경제적 약자의 최후의 보루”라며 “대규모유통업법은 소상공인의 권익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데 공정위 조사가 실질적으로 이뤄지지 못하면 소상공인의 권익을 지킬 방법이 없다”고 강조했다.
공정위 현장조사가 기업의 방어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조사 방식의 특성을 설명하며 반박했다. 주 위원장은 “공정위 현장조사는 피조사자의 동의를 구해 이뤄지는 것이고 경찰·검찰의 형사적인 압수수색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라며 “현장 조사 때문에 기업이 영업을 못 하거나 생산 활동이 중단되는 일은 있지 않다”고 말했다.
법원이 효력정지를 결정할 때 기업이 입는 불이익뿐 아니라 공정위 법 집행을 통해 보호하려는 공공의 권익도 함께 살펴야 한다는 주장도 내놨다. 주 위원장은 “조사 때문에 기업의 방어권이 침해되는지 판단할 때는 반드시 법에서 보호하는 공공의 권익이 뭔지와 비교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정위의 가격 재결정 명령을 둘러싼 집행정지 결정도 같은 맥락에서 언급됐다. 서울고법은 제지·제분 업체의 가격 재결정 명령에 대한 집행정지 신청도 받아들였다. 주 위원장은 “주기적으로 가격 재결정과 경쟁 회복 여부를 판단할 기회가 상실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기업에 어떤 회복할 수 없는 침해를 야기했는지 솔직히 굉장히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가격 재결정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면 회복할 수 없는 침해는 소비자 전체에게 발생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공정위의 조사 권한 자체를 대폭 강화하는 방안에는 선을 그었다. 강제조사나 특별사법경찰(특사경) 도입 가능성에 대해 주 위원장은 “대부분은 조사 협조를 잘 받아서 이뤄지고 있다”며 “두 개 사건 때문에 지금까지 도입하지 않았던 특사경을 본격적으로 고려해야 할 상황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쿠팡의 동일인 지정 과정에서 허위 자료를 제출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법과 원칙에 따른 조치를 예고했다. 주 위원장은 “신속히 확인하고 조사를 마무리해 엄정 조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최근 미국 정치권에서 한국 정부의 쿠팡 규제를 문제 삼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는 미국 경쟁당국과의 양자회담에서 개별 사건보다는 양국의 현안과 공정거래법 집행 방향 등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가 중심이었다고 설명했다. 미 하원에서 자국 기업을 차별하는 외국 공무원의 미국 입국을 제한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추진하는 데 대해서는 “직접 대응하기보다는 외교부를 통해 필요하면 의견을 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 위원장은 쿠팡에 대한 한국 정부의 규제가 차별적이라는 주장에도 “우리나라는 IT 강국으로서 해외 기업을 대상으로 법 집행을 가장 적극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며 “과거 25년간 한 번도 법 집행의 차별성이나 불공정성이 문제 제기된 바 없다”고 말했다.
연내 반복 담합 사업자의 시장 참여를 제한하는 제도도 추진한다. 공정위는 소방시설공사업법 등 안전 분야, 폐기물관리법 등 환경 분야, 여객자동차법 등 운송 분야를 포함해 약 20개 업종에서 반복적으로 담합하는 사업자의 등록·허가 취소나 영업정지 등을 관계 부처와 협의하고 있다. 주 위원장은 “반복 담합을 획기적으로 근절하려면 담합으로 인한 기대이익을 완전히 박탈하는 강도 높은 제도가 도입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독과점 남용을 해소하기 위한 시장 퇴출, 기업 매각 등 구조적 조치도 추진한다. 이를 둘러싸고 일각에서 사업 양도 등 구조적 조치가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지적에 대해 주 위원장은 “영업 양도의 경우 그 영업이 가져오는 미래 현금흐름의 현재 가치를 돈으로 바꿔서 파는 것이기 때문에 재산권을 유지할 수 있다”며 “재산권은 보장하면서 독과점 남용을 해소할 수 있는 수단이 구조적 조치”라고 말했다.
배달앱 수수료와 광고료에 대해서는 인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주 위원장은 “광고료를 포함해서 입점 업체의 부담이 과도하고, 전체적인 부담이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과도한 가격에 대해선 규제 당국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정위는 배달앱 시장의 비용 부담을 낮추기 위한 특별법 입법도 국회와 논의를 이어갈 방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