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가상화폐 시장의 포괄 규제안인 ‘클래리티법’이 상원 문턱을 넘지 못했지만 제도화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토큰화 주식 거래의 길을 연 데 이어 미 하원에서는 가상화폐 세제와 비트코인 전략비축 법안이 잇따라 진전됐다. 포괄 입법이 막힌 사이 금융당국의 규제 조치와 사안별 입법이 동시에 진행되는 모습이다.
19일 주요 외신에 따르면 클래리티법 상원 절차표결에서 제동이 걸린 뒤 이틀 새 미국 내 가상화폐 관련 굵직한 조치들이 연이어 발표됐다. 가장 선도적으로 움직인 곳은 SEC다. SEC는 17일(현지시간) 토큰화된 미국 상장 주식을 블록체인에서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혁신 면제(Innovation Exemption)’를 발표했다. 일정 요건을 갖춘 토큰화 증권거래소(TSV)를 증권거래법상 거래소 정의에서 한시적으로 제외하고 일부 유동성 공급자의 딜러 등록 의무도 면제한다. 적용 기간은 5년이다.
폴 앳킨스 SEC 위원장은 이번 조치의 배경으로 클래리티법의 상원 표결 실패를 언급했다. 그는 “이번주 초 의회가 클래리티법을 진전시키는 데 실패했다”며 SEC가 법적 권한 안에서 미국 자본시장의 온체인 거래를 촉진하기 위한 조치에 나선다고 밝혔다. 의회의 결론을 기다리기보다 기존 증권법상 면제 권한을 활용한 것이다.
미 의회에서는 범위를 좁힌 법안들이 속도를 냈다. 미 하원 세입위원회는 16일(현지시간) ‘디지털자산 세금 명확화법’을 찬성 38표, 반대 5표로 가결했다. 채굴·스테이킹의 과세 기준을 명확히 하고 신고 부담을 줄이는 등 가상자산 세제를 정비하는 내용이 골자다.
제이슨 스미스 미 하원 세입위원장은 법안 처리 후 “가상화폐를 소유하고 거래하는 미국인들에게 세금 확실성을 제공하고 규제 준수 부담을 낮출 것”이라고 강조했다. 클래리티법 통과 여부와 무관하게 당장 시장에 필요한 세금 규칙부터 손보겠다는 의지다.
비트코인 전략비축을 법제화하는 작업도 한 단계 진전됐다. 미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는 같은 날 ‘2026년 미국 비축 현대화법’을 가결했다. 법안은 미 재무부에 ‘전략적 비트코인 비축’과 별도의 ‘디지털자산 비축’을 두도록 했다. 전략비축에 편입된 비트코인은 최소 20년 동안 보유해야 한다. 이 기간에는 매각·교환·경매하거나 담보로 제공할 수 없다. 행정명령을 토대로 만들어진 비트코인 전략비축을 법률로 뒷받침하려는 것이다.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역시 17일(현지시간) 시장 친화적 행보에 동참했다. 고객 거래 지원 소프트웨어를 제공·홍보하는 ‘수동적 소프트웨어 제공자(passive software provider)’에 대해 일정 요건 충족 시 제재를 하지 않는 노 액션(No-action) 방침을 내놓은 것이다. 가상화폐 전용 조치는 아니지만 지갑과 같은 소프트웨어를 통한 금융시장 접근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클래리티법은 15일(현지시간) 상원 토론 종결 표결에서 찬성 49표, 반대 50표를 얻었지만 의결에 필요한 60표를 확보하지 못했다.
글로벌 금융권은 클래리티법 좌초 이후 SEC와 CFTC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JP모건은 클래리티법이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지만” 연내 통과할 수 있는 시간은 “극도로 희박해졌다(extremely narrow)”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투자자와 가상화폐 시장의 관심이 SEC와 CFTC로 옮겨갈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당국의 핀셋 조치가 포괄 입법을 온전히 대체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SEC와 CFTC의 현행 규칙은 향후 정책 기조 변화나 법적 소송 결과에 따라 언제든 뒤집힐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앳킨스 위원장 역시 “이번 임시 조치 이후에는 지속 가능한 규칙 제정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