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한국 제조업의 미국 영토 확장 해법’을 주제로 열린 서울경제 미래컨퍼런스 2026에 모인 참석자들은 “자유무역 시대가 종언을 고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산업정책이 필요해졌다”고 입을 모았다. 민간기업의 ‘개인기’만으로는 네덜란드 ASML과 같은 대체 불가 기업이 출현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은 제2의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최적의 환경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도체부터 2차전지·조선·로봇·방산·바이오 등 미래 산업 전 종목에서 대표 선수를 이미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김세진 법무법인 세종 통상산업정책센터장은 이날 주제강연에서 “올림픽에 비유하면 한국은 선수단 규모는 작아도 전 종목에 출전할 수 있고 여러 종목에서 메달권을 노릴 수 있는 풀스택 제조 역량 국가”라고 강조했다. 자유무역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은 다른 나라와 전략적 협력을 펼칠 여지가 많은 산업 강국이라는 의미다.
김 센터장은 “세상은 이제 ‘조건부 자유무역 시대’가 되고 있다”며 “기업도 자유롭게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팔 수 있는지 조건이 까다로워졌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과거에는 중국 기업들이 유럽의 기업을 공격적으로 매수해 기술 역량을 빠르게 키울 수 있었는데 이제는 유럽연합(EU) 차원의 통제로 그렇게 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이는 중국의 추격에 시달리던 한국에는 시간을 벌어주는 효과가 있다. 김 센터장은 “해외 기업을 인수하거나 협력하더라도 이와 연결할 국내 산업 기반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은 그런 연결점을 많이 찾을 수 있다”며 “유럽에는 기술을 갖고 있지만 후속 인수자나 사업 파트너를 찾지 못한 기업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방식으로 글로벌 제조업 가치 사슬에서 대체 불가능한 공급자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이 김 센터장이 제시하는 전략이다. 첨단 반도체 노광 장비를 독점 공급해 ‘슈퍼 을’이라고 불리는 네덜란드의 ASML과 같은 기업을 여럿 육성할 수 있도록 통상·외교·경제안보 정책을 설계하고 여기에 금융정책까지 연계해 선진국이 쌓아온 축적 과정을 압축적으로 달성하자는 것이다.
김 센터장은 첨단산업에서 이를 달성하는 데는 ‘암묵지’라고 불리는 오랜 기간 축적된 경험과 지식을 효과적으로 흡수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반도체 업계 관계자에게 중국의 추격을 우려하는 질문을 했더니 사람 한두 명 가져간다고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고 전하며 “첨단산업일수록 오랜 경험과 지식이 개인을 넘어 조직에 쌓여 있다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기업들이 해외에서 기술을 사올 때 단순히 특허나 라이선스만 확보하는 경우가 많다”며 “여기에 그치지 말고 이들의 암묵지를 어떻게 압축해 가져올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대미 투자 역시 축적의 시간과 공간을 압축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단순히 생산 시설을 미국이라는 공간으로 옮기는 것을 넘어 새로운 경험을 쌓는 공간으로 활용하자”며 “선진 기술을 가진 기업의 경영권을 확보하고 대규모 고객과 지속 접촉하며 제품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다음 세대의 기술을 배울 수 있다”고 조언했다.
장영진 한국무역보험공사 사장 역시 한국이 미중 갈등 시대를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장 사장은 “미국의 중국에 대한 견제는 발전 속도를 늦추는 기술 견제와 미국 수출을 막는 시장 구분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진행 중”이라며 “기술 견제 전략은 그리 오래 통할 것 같지 않지만 시장 구분은 유럽까지 참여하고 있어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장 사장은 “그렇다 해도 우리가 팔 물건이 없으면 소용이 없지 않겠느냐”며 “최근 주력 수출 상품이 바뀌지 않고 있다. 새로운 수출거리를 꾸준히 개발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소재·부품·장비 영역에서 산업정책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것이 장 사장의 분석이다. 장 사장은 “기업들을 만나보면 대기업은 잘나가도 2·3차 협력사 일감은 줄어든다고 한다”며 “대체재인 중국산의 품질이 국내 기업에 근접했거나 뛰어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 정부 주도 정책을 통해 소부장 제품을 국산화하면 해외 기업이 부르는 공급 가격이 절반으로 떨어지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며 “반대로 생각해보면 국내 기업들이 고사한 뒤에는 중국 기업들이 값을 지금처럼 싸게 유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고 우려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