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소재 제조업 A사 최고경영자(CEO)는 승계할 자녀가 없어 처음부터 임직원을 후계자로 염두에 뒀다. 보유 자산 일부는 공익법인에 출연하는 것도 고민 중이다. 그는 직원이 물려받을 때의 세제 혜택과 인수금융이 얼마나 될지 걱정하고 있다. 직원 입장에서는 최소 수십억 원에 달하는 자금을 마련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A사처럼 자녀가 아닌 프라이빗에퀴티(PE)나 임직원 같은 제3자에게 기업을 넘기는 방안을 검토하는 중소기업이 45%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됐다. 시장에서는 기술력 보존과 고용 안정을 위해서는 임직원 승계가 중요한 만큼 이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16일 금융계에 따르면 8월 말 현재 우리은행 기업승계지원센터와 협약을 맺은 1500개 중소기업을 분석한 결과 ‘3자 매각과 자녀 승계를 모두 검토한다’는 곳은 628개사(41.9%)에 달했다. ‘3자 매각만 검토한다’는 답변(2.9%)을 더하면 44.8%의 기업이 3자 매각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셈이다. ‘자녀 승계’는 44.7%였다.
이들 업체의 대표자 연령은 60~69세가 42.1%로 가장 많았다. 업력 역시 20년 이상 된 곳이 60.4%를 차지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은행을 찾은 기업들의 51.6%가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대로 된 승계가 이뤄지지 않으면 단순 일자리 감소가 아니라 기술 경쟁력의 후퇴와 공급망 단절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도 이런 문제를 인지하고 있다. 재정경제부는 지난달 세제개편안을 통해 5년 이상 근무한 임직원이 기업을 승계받을 경우 양도소득세를 감면해주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예고했다. 이소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 역시 전날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중소기업 승계에 제3자 인수합병(M&A)과 임직원 인수 길이 열려야 한다”고 밝혔다.
충청도에 위치한 B 식품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는 자녀에게 기업을 물려줄 계획이었다. 하지만 경영권을 넘겨받기 전 회사에서 근무하던 자녀는 부모에게 “승계받지 않겠다”고 강경한 의사를 전달했다. 직접 일을 해보니 직원으로 일하는 편이 본인에게 맞다고 판단했다. 결국 B 기업은 인수합병(M&A) 시장에서 매각됐다.
이는 특이 사례가 아니다. 중소기업의 경양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고 있는 은행권에서는 앞으로 이 같은 일들이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실제 8월 말 현재 우리은행 기업금융센터와 협약을 맺고 있는 중소기업 1500곳을 보면 대표자 연령이 60~69세인 곳이 631개(42.1%)이고 70~79세는 15.1%, 80세 이상은 1.9%다. 업력으로 봐도 30~39년인 기업이 257개(17.1%)에 달하고 40년 이상 역시 96개사(6.4%)에 달한다.
문제는 B사처럼 자녀가 기업을 승계하지 않으려고 하는 기업이 많다는 점이다. 우리은행 협약 업체 중 44.8%가 제3자 매각을 검토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오너 자녀가 5년 이상 직접 해보고 못하겠다고 하는 곳들이 한두 곳이 아니다”라며 “대표들이 자녀들을 잘 키우면서 의사와 교수·변호사 등 전문직으로 나서면서 제조업을 안 하려는 이들도 많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중소 제조 업체일수록 이 같은 고민이 크다는 점이다. 협약기업을 매출로 구분해보면 500억 원 미만이 전체의 79.4%를 차지했다. 500억~999억 원은 13.1%, 1000억 원 이상은 7.5%다. 상시 근로자 역시 50인 미만인 업체의 67.9%가 협약에 들었다. 소기업일수록 후계자 확보와 승계 방식 확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뜻이다.
이들 기업의 상당수는 지역사회에서 수십 년간 고용을 창출하며 업력을 쌓아온 업체들이다. 제3자 매각의 해법 중 하나로 프라이빗에퀴티(PE)에 넘기는 방안도 있지만 이 경우 고용이 불안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많다. 특히 PE는 소기업에 관심을 갖기 어렵다.
이에 금융계와 산업계는 임직원 승계를 현실적인 대안으로 꼽는다. 경영진인수(MBO)와 종업원인수(EBO)는 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내부 인력이 지분을 사들여 경영을 이어가는 방식이다. 임직원들은 자체 기술과 조직 문화는 물론 거래처와 같은 산업 생태계에 대한 이해가 높기 때문에 사업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데 유리하다.
해외 주요국은 이미 임직원 승계를 지원하기 위한 제도가 마련돼 있다. 일본은 2007년 초고령사회 진입 이후 중소기업의 휴·폐업이 급증하자 경영승계원활화법을 제정해 제3자 승계를 지원했다. 조세특별조치법을 통해 기업승계에 따른 설비투자 세액공제, 부동산 취득세 경감 등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임직원들의 승계 자금에 대한 지원도 늘렸다. 그결과 친족 승계가 주를 이뤘던 일본도 2024년 기준 친족 승계와 임직원 승계 비중이 각각 35%로 같아졌다. 김유재 우리은행 기업승계지원센터장은 “일본은 임직원 승계 과정에서 자금을 원활하게 마련할 수 있게 정책금융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가 보증을 적극적으로 제공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은 차입형 종업원주식소유제도(ESOP)를 통해 직원들의 기업 인수를 지원한다. 비상장기업의 대주주가 총 주식의 30% 이상을 ESOP에 매각하는 경우는 과세를 이연해주고 임직원들이 기업 인수에 나설 경우 중소기업청(SBA)이 최대 85%까지 보증을 제공한다.
학계에서는 한국도 임직원 인수금융 보증과 세제 지원을 더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정경제부가 올해 세제개편안에서 ‘피승계기업에서 5년 이상 계속 근무한 임직원’의 경우 3자 사업 승계 시 양도소득세 감면을 신설한다고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이야기다.
실제 현장에서는 금융 수요가 적지 않다. 우리은행은 협약 업체 269개사에 승계 지원 컨설팅을 마쳤다. 이 중 기업가치 평가와 M&A 자문 실적이 11곳이다. 기술보증기금 M&A 협약보증을 활용한 여신 지원은 160억 원(4건)에 달한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중소기업은 현실적으로 정부의 지원이 있어야 승계가 가능하다”며 “정책금융기관의 보증이나 인수금융 같은 지원이 따라붙어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