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지역 분쟁이 호르무즈 해협을 넘어 홍해까지 확산하면서 국제 유가가 다시 급등하자 정부가 정유 4사를 소집해 긴급 대책 마련에 나섰다. 정부는 선적 지연이나 피해 상황을 점검하고 중동 외 지역에서 수입을 확대하기 위해 운임 차액 지원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또 석유 수급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을 종합해 ‘석유 수급 안정화 진단 지표’도 개발한다.
산업통상부는 14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문신학 차관 주재로 ‘원유 수급 상황 긴급 점검 회의’를 열었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는 한국석유공사는 물론 SK에너지와 GS칼텍스,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사의 임원도 참석했다.
정부 관계자는 “이미 9~10월은 전년 대비 90% 이상 수준의 원유 수입 물량을 확보해 당장 국내 원유 수급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면서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송유관 재개 현황을 지속 점검하고 수에즈 운하를 활용하는 우회 항로를 지원하는 등 가용 정책을 총동원해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예정에 없던 회의를 소집한 것은 중동 전쟁이 페르시아만을 넘어 홍해까지 번졌기 때문이다. 우선 예멘의 친이란 반군 후티가 홍해의 페림섬과 모카항을 점령했다. 두 곳은 홍해와 인도양을 연결하는 바브엘만데브 해협의 전략적 요충지다. 게다가 호르무즈 해협 대신 전 세계에 원유를 공급하던 사우디아라비아의 동서 파이프라인마저 이라크에서 발사된 드론의 공격을 받고 가동을 멈췄다.
중동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한동안 안정세를 보이던 국제 유가와 석유제품 가격은 다시 고공행진 중이다. 지난달 7일만 해도 배럴당 80.8달러 수준이던 두바이유 현물 가격은 이달 11일에는 123.7달러로 뛰었다. 싱가포르에서 거래되는 휘발유의 국제 가격은 11일 147.9달러로 한 달 전보다 26.8% 상승했다. 같은 기간 나프타 국제 가격 역시 15.2% 급등했다.
정부는 중동 상황을 면밀히 살피며 예정된 원유 도입 계약 물량이 제때 국내 도착하도록 만전을 기하겠다는 방침이다. 당장 유조선이 홍해의 얀부항을 출발해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통하지 않고 수에즈 운하를 경유할 경우 운항 기간이 30일가량 더 필요하다. 동서 파이프라인 복구에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해 한동안은 수에즈 운하로 우회해도 사우디로부터 원유를 공급받기 어려울 수 있다. 한국이 올해 1~7월 사우디에서 수입한 원유는 160억 4600만 달러로 전체의 31.3%에 달한다. 지난해보다 비중이 소폭 줄었지만 여전히 국가별 순위에서는 사우디가 1위다.
이에 정부는 중동발 원유 수급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100%까지 올렸다가 다시 25%로 낮췄던 원유 운임 차액 지원 비율을 다시 늘리는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기업이 미주·아프리카·동남아시아 등에서 원유를 쉽게 확보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정부 관계자는 “정유사가 대체 원유를 도입할 경우 운임 차액을 더 지급할 수 있도록 관계 부처와 협의 중”이라고 설명했다.
3월 13일 이후 계속 유지되고 있는 석유 최고가격제를 두고는 정부의 고심이 깊어질 전망이다. 당초 정부는 6개월 정도 시행하는 것을 전제로 가격 상한제를 도입했는데 미국·이란 전쟁이 예상보다 훨씬 길어지고 유가마저 다시 오르고 있어서다. 이에 업계에서는 정부가 18일 종료되는 9차 최고가격제를 한 차례 더 연장 시행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원유 가격에 연동해 액화천연가스(LNG) 가격이 널뛴다는 점도 골칫거리다. LNG 수입에서 중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어 당장 수급에는 문제가 없지만 가격 상승분이 시차를 두고 전기요금과 난방비에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한편 정부는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응하기 위해 석유 수급 안정화 상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판단 지표를 개발한다. 이를 위해 석유관리원은 11일 ‘석유 수급 안정화 진단지표 개발’ 연구 용역을 발주할 예정이다. 단순히 국제 유가뿐 아니라 중동 국가의 공식 판매 가격(OSP)이나 유조선 용선료 등 다양한 비용요인을 한 번에 모니터링하고 도입국·도입선별 위험은 물론 정부와 민간 실비축량, 국제공동비축량까지 정량화해 석유 공급망의 안전도를 판단할 수 있는 지표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