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요약
△미·이란 전쟁 장기화와 중동발 공급 차질로 세계 석유 재고가 급감하면서 국제유가가 다시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중국의 석유 수요 감소가 유가 상승을 제약하고 있지만, 중동의 공급 충격이 이어지면서 당분간 국제유가의 불확실성도 커질 전망입니다. IEA는 올해 세계 석유 시장에서 코로나 19 팬데믹 때와 비슷한 ‘수요 충격’이 나타날 수 있다고 예상했습니다.
△고유가는 전기화와 재생에너지 전환을 앞당기는 동시에 새로운 화석연료 인프라 투자를 촉진할 수도 있어 ‘석유 시대’가 갈림길에 섰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국제유가가 심리적 기준선으로 볼 수 있는 배럴당 100달러를 다시 넘었습니다. 교전을 재개한 미국과 이란이 상대국 또는 제3국 유조선을 타깃으로 삼아 공격하고, 예멘 후티 반군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전면전으로 치닫는 등 호르무즈해협과 바브엘만데브해협(홍해)이라는 양대 에너지 수송로가 다시 불길에 휩싸인 영향입니다.
“전쟁이 4주면 끝날 것” 이라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호언장담(?)을 믿은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이 전쟁이 7개월이나 계속될 것이라고 예상한 이들 또한 많지는 않아 보입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세계 석유시장 상황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또 고유가가 에너지 전환 속도를 높일지 아니면 오히려 늦출지 등 가능성들을 따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재고 ‘위험 수위’
유가가 세 자릿수로 오른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이 예상 외로 길어지면서 세계 석유 재고가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상황이죠. 9일(현지 시간)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원유와 정제 석유제품 등 세계 석유 재고는 올 들어 8월까지 약 4억 배럴 감소했습니다. 미국과 이란 간 긴장 고조에 따른 원유 공급 차질이 주된 원인으로 꼽히는데요. EIA는 사우디아라비아와 후티 반군 간 무력 충돌이 발생하면서, 호르무즈해협 우회로 역할을 해온 홍해를 통하던 에너지 수송이 급감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실제로 중동 지역의 원유 생산 중단량은 7월 하루 500만 배럴에서 지난달에는 하루 670만 배럴까지 증가했습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중국이 이라크와 사우디아라비아산 원유를 적극적으로 구매하고 있다고 전했는데요. 흥미로운 점은 중국의 석유 소비가 감소하는 상황에서도 원유 구매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석유 소비 감소가 국제 원유시장에 미칠 영향은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석유제품 수급은 더 심각합니다. 최근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부터 정제설비를 공격받아 디젤 금수조치를 내린 영향으로 디젤 가격도 급등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중동에서 감소한 석유제품 공급은 각각 하루 약 200만 배럴, 총 400만 배럴입니다. 세계 최대 독립 에너지·원자재 트레이딩 기업인 비톨의 러셀 하디 최고경영자(CEO)는 “전 세계 석유제품은 거의 바닥 상태”라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시험대 오른 ‘스윙 바이어’
이처럼 쌓아둔 석유가 점점 말라가고 있는 상황은 그간 공급 과잉 우려로 제한됐던 유가 상승 폭을 예상보다 높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눈에 띄는 점은 최근 중국 석유 수요가 올해 크게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음에도 유가가 아래로 밀리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최근 중국석유화공(시노펙) 산하 경제기술연구원은 올해 중국의 하루 평균 석유 수요가 60만 배럴씩 줄어 전년 대비 8.9%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고요. 중국석유천연가스그룹(CNPC) 산하 중국석유계획총원도 올 6월 신에너지 전환과 고유가 등의 영향으로 올해 중국의 석유 소비가 전년보다 4.9% 감소한 7억 5300만톤에 그칠 것으로 내다본 바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시장은 수요보다는 공급 쪽 문제를 좀 더 주시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석유 선적 추적업체 보르텍에 따르면 전 세계 석유 하루 약 1000만 배럴, 즉 전 세계 석유 수요의 약 10%에 해당하는 석유 수출량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미국 경제 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는 ‘100달러 유가’가 그동안 수요를 통해 유가를 조절하는 ‘스윙 바이어‘ 역할을 해온 중국을 시험대에 올렸다고 분석했습니다.
화석연료 ‘엑시트’ 가속?
연재를 통해 전해드렸듯, 1970년대 중동 오일쇼크는 원자력, 재생에너지 등 대체 에너지 개발을 가속화하는 계기로 작용해왔습니다. 이번 미국과 이란 전쟁도 마찬가지인데 문제는 지금이 과거와는 다른 에너지 전환기라는 점이죠.
이와 관련해 FT는 최근 ‘Pricey oil is laying the groundwork for its own decline’이라는 제목의 분석 기사를 내놨는데요. ‘비싼 유가가 스스로 쇠퇴의 토대를 만들고 있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고유가가 탄화수소의 퇴장 시기를 앞당길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FT는 근거 가운데 하나로 아프리카를 들었는데요. 중동산 석유와 가스를 많이 사용하는 아프리카에서는 올해 태양광 설치량이 45% 증가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아프리카에서 최근 12개월 동안 수입한 중국산 태양광 패널 비용은 24억 달러로, 연간 100억 달러 규모의 디젤 비용을 대체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하네요. 또 우리나라를 포함해 태국, 파키스탄 등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에 의존하는 국가들이 점차 원자력과 재생에너지 같은 대체 에너지로 점점 더 눈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 또 다른 근거입니다.
물론 갑작스러운 석유·가스 공급 감소로 석탄 소비가 크게 증가했지만, 이는 중동 전황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실제로 IEA는 올해 세계 석탄 소비량은 89억 4000만톤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는데요. 그러나 이와 동시에 중동산 석유·가스 운송이 재개된다면 석탄 소비는 다시 감소할 수 있다고 IEA는 전망했습니다.
‘脫 호르무즈’에서 끝날 수도
반대의 가능성은 없을까요? 고유가가 에너지 전환 속도를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탄화수소 관성을 키우는 가능성 또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중동 이외 지역의 공급량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더 확대되고 있습니다.
악시오스에 따르면 사우디 주도의 생산량 통제에 반발해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탈퇴한 아랍에미리트(UAE)는 파이프라인 용량을 현재 일일 150만 배럴에서 내년까지 300만 배럴로 2배 늘린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만큼 공급 물량은 증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 가이아나 등 비 OPEC+ 또한 중동산을 대체하기 위한 공급 증가를 서두르고 있기도 합니다. 이들은 미국·이란 전쟁이 터지기 전 글로벌 석유 시장에 공급 과잉 우려를 불러온 곳들이기도 합니다. ‘탈호르무즈’가 곧 ‘탈화석연료’를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시각이 가능한 것이죠.
이번 중동 사태를 계기로 대규모 투자가 이뤄진 LNG 터미널, 송유관, 저장시설, 신규 유전 등이 최소 투자비를 회수할 때까지 계속 가동하려는 경제적 유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대체에너지 투자 확대에 대한 반대의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당장 100달러를 넘어선 유가 자체는 얼마나 오래갈까요. 100달러 유가가 생각보다 장기간 지속되지 않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중동 생산 회복, 비 OPEC+ 증산 등이 맞물린다면 다시 빠른 속도로 공급이 증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 EIA는 올해 하반기 평균 90달러에서 내년 2분기 77달러, 하반기에는 67달러까지 내려갈 것으로 전망합니다.
또 고유가가 소비 위축으로 이어져 다시 유가를 끌어내리는 구조 역시 가능합니다. IEA는 올해 세계 석유 수요가 지난해보다 하루 평균 250만 배럴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는데, 연평균 기준으로 2020년 코로나19 대유행(팬데믹) 이후 가장 큰 감소 폭입니다. 다만 공급 감소 폭은 이보다 더 큽니다. IEA는 올해 세계 석유 공급이 지난해보다 하루 평균 570만 배럴 감소하면서, 결국 공급량이 수요보다 하루 약 175만 배럴 부족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100달러 유가가 얼마나 유지될지, 화석연료 시대의 종말을 앞당길지 각 시나리오별로 살펴봤습니다. 비싼 석유와 가스는 전기차·재생에너지·원전의 상대적 경쟁력을 높이지만, 동시에 각국에는 더 안전한 석유·가스 공급망을 구축할 유인을 제공합니다. 이번 전쟁이 ‘탈화석연료’를 앞당길지, 아니면 ‘탈호르무즈’에 그칠지는 앞으로 이 두 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강하게 작용하느냐에 달렸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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