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대 대법원장이 11일 ‘제12회 법원의 날’ 기념행사에서 ‘정치권·외부 세력으로부터 법원의 독립’을 다시 강조한 것은 최근 심화되고 있는 대법관 추천을 둘러싼 대통령실과 정치권과의 갈등을 의식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청와대가 노태악 전 대법관 후임자로 김민기 서울고법 판사 제청을 요구하는 가운데 조 대법원장이 대법관 후보추천위원회를 새로 꾸리는 선택을 하면 청와대·민주당과 사법부가 다시 한번 정면충돌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조 대법원장은 이날 법원의 날 행사에서 “헌법상 독립된 법원이 다른 국가기관이나 정치권력으로부터 부당한 간섭이나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대법원장이 공식 행사에서 ‘정치권력’이나 ‘다른 국가기관’을 언급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지난해 법원의 날 행사에서 조 대법원장은 당시 정치권과의 갈등에도 “사법부가 헌신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재판의 독립이 확고히 보장돼야 한다”고만 했다. 통상 조 대법원장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재판의 독립’ 수준의 메시지를 내는 정도에 그친다.
지난달 28일 청와대는 조 대법원장의 손봉기 부장판사 대법관 제청을 양측 합의가 없었다는 이유로 반려했다. 올 3월 퇴임한 노 전 대법관 후임 인선이 7개월째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의 최우선 후보는 손 부장판사가 아닌 김 고법판사로 알려졌는데 조 대법원장은 김 고법판사의 남편이 오영준 헌법재판관이라는 이유로 이해충돌 문제가 있어 손 부장판사를 낙점한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가 재제청을 요구한 가운데 조 대법원장은 입장 발표를 다소 늦추고 장고에 들어갔다. 당초 조 대법원장은 이달 첫째 주께 공식 입장을 내놓겠다고 했다. 하지만 최근 부친상 등 개인적인 사정으로 검토가 다소 늦어졌다. 최근 조 대법원장은 학계나 법조계 의견 청취를 시작하면서 입장 발표는 더 늦어질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대법원의 한 관계자는 “조 대법원장은 입장을 빨리 발표하는 것보다 학계 등 여러 의견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이달 16~19일에는 제20차 아시아태평양 대법원장 회의도 있어 공식 입장 발표는 추석 전후가 될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현재 조 대법원장이 쥐고 있는 카드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청와대가 반려한 손 부장판사를 제외한 나머지 기존 후보자 3명 중 1명을 다시 제청하는 방안이다. 둘째, 기존 후보군을 백지화하고 대법관 후보추천위원회를 새로 꾸려 전면에서 새로운 인물을 물색하는 강수다. 법조계는 이해충돌 우려가 명백한 김 고법판사를 조 대법원장이 수용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고 본다. 따라서 이날 ‘정치권력 간섭 배제’를 선언한 만큼 새 후보추천위를 구성해 정면 돌파를 시도할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다만 조 대법원장이 새로운 후보추천위를 꾸리면 청와대와 여권은 조 대법원장 탄핵을 포함해 사법부 압박 수위를 최고조로 높일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민주당 ‘사법행정 정상화 태스크포스(TF)’는 법원행정처를 없애고 외부 인사가 참여하는 사법행정위원회를 설치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또 대법관후보추천위 제도 개편도 추진하며 관련 법 개정 검토도 진행되고 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여권에서 현재 내놓은 사법개혁안을 또다시 강행하려 한다면 실질적으로는 사법부를 길들이려는 정치적 압박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