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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들어오니 곳곳서 빨대만”…325조 쥐고도 M&A 구경꾼 신세

08.09.2026 1분 읽기

국내 대기업들이 수년째 초대형 인수합병(M&A) 시장에서 자취를 찾아볼 수 없던 이유는 부족했던 자금 여력, 투자 실패 리스크, 의사 결정 속도, 인수후통합(PMI) 난항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기본적으로 신사업을 보는 전략기획실에서 매년 수십 건의 인수 후보 매물을 검토해도 정작 임원, 최고경영자(CEO)를 거쳐 오너까지 보고된 뒤에는 휴지통으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한 대기업 임원은 “단기간에 성적표가 매겨지니 규모가 큰 딜을 밀어붙이기에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그나마 올해 들어 여건이 바뀐 것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대기업들의 곳간이 유례 없이 빠른 속도로 채워진 부분이다. 메모리반도체 슈퍼 사이클과 주력 산업의 실적 개선이 맞물리면서 주요 그룹사들의 유동성이 대폭 늘어났다. 문제는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이자 현금 중 상당 부분을 배당과 내부 성과급에만 소진할 수 있는 상황에 처했다는 점이다. 글로벌 빅테크들이 배당을 전혀 하지 않으며 천문학적인 자금을 차세대 인공지능(AI) 생태계 선점을 위한 빅딜에 쏟아붓는 것과 상반된다. 시장에서는 당장의 역대급 실적에 취해 ‘넥스트 반도체’를 발굴할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다는 뼈아픈 지적이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유동성 실탄이 쌓인 지금이야말로 기업들이 방어적인 현금 집행을 멈추고 자본 배분 원칙을 재정립, 미래 판도를 바꿀 전략적 투자에 나설 적기라고 입을 모았다.

8일 투자은행(IB) 업계와 삼일PwC에 따르면 올 상반기 전 세계 AI 및 정보기술(IT) 분야에서 발생한 M&A 거래는 약 6410억 달러(약 862조 4000억 원)에 달했다. 전년 같은 기간 대비 80% 늘어난 금액이다. 글로벌 빅테크들이 대규모 M&A로 미래 생존 경쟁에 사활을 걸면서 시장 규모가 급증한 것으로 분석됐다.

반면 국내 기업들은 현금 실탄을 쌓아두고도 글로벌 M&A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5개 그룹 주력 계열사(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차·LG전자·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이들의 올 상반기 현금성 자산은 총 325조 1000억 원으로 지난해 상반기(154조 5000억 원) 대비 110.4% 급증했다. 특히 삼성전자가 190조 원, SK하이닉스가 88조 원을 기록하며 양 사 합산 현금만 약 278조 원에 달했다. LG전자(10조 1000억 원)와 한화에어로스페이스(9조 2000억 원)도 현금을 대폭 늘렸으며 현대차는 27조 8000억 원의 실탄을 확보해 둔 상태다.

문제는 이 압도적인 자금력이 기업의 미래 지형을 바꿀 ‘빅딜’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의 밸류업 정책 기조와 국내외 행동주의 펀드의 압박, 최근 심화된 노조의 성과급 인상 요구가 맞물리면서 기업의 현금 상당 부분이 내부 보상과 주주 달래기에만 쏠리고 있는 현실이다.

실제 삼성전자는 잉여현금흐름(FCF)의 50% 환원 정책에 따라 올해 대규모 특별 배당과 자사주 매입·소각을 단행할 계획이다. 업계는 삼성전자가 올해에만 100조 원이 넘는 주주환원 자금을 쏟아부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SK하이닉스도 사정은 비슷하다. 누적 FCF의 50% 이상을 주주에게 돌려준다는 계획 아래 지난달 40조 원 규모의 자사주 취득·소각 안건을 의결했다. 올 3분기 실적 발표 때 수십조 원 규모의 추가 주주환원 계획이 공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에 최근 각 사 노조들이 잇따라 영업이익의 상당 비율을 성과급 형태로 요구하면서 회사의 자금 집행 부담은 가중되고 있다. 조 단위 자금을 M&A에 베팅하기보다는 단기 성과 보상과 주주환원 등에 우선 투입하는 경직된 자금 운용 구조에 갇히고 있다는 비판이다. 투자 업계 고위 관계자는 “미쓰비시는 이미 투자를 많이 한 뒤 벌어들인 돈의 30~40%를 배당한다”며 “기업 투자가 먼저 이뤄져 성장을 해야 주주에게도 좋은 것”이라고 쓴 소리를 날렸다.

국내 대기업의 소극적인 M&A 성향과 미약한 글로벌 네트워크, 리스크 회피 심리도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해외 대형 딜의 실패 경험이 여전히 트라우마로 남아있기도 하다. 시장의 잣대도 엄격하다. 대형 M&A 추진 시 즉각적인 성과 요구와 비판이 뒤따르다 보니, 전문경영인 입장에서는 굳이 큰 리스크를 안고 빅딜을 시도할 유인이 적다.

실제 한국 기업들의 다소 보수적인 자금 운용은 글로벌 경쟁사들의 과감한 행보와 대조를 이룬다. 글로벌 빅테크들은 대형 사모펀드(PEF)와 손잡고 AI·반도체뿐만 아니라 데이터센터, 전력·인프라, 피지컬AI와 모빌리티에 이르기까지 AI 생태계 주도권을 잡기 위해 매년 수십조 원 단위의 메가딜을 성사시키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이들에 뒤지지 않는 역대급 실탄을 품에 안고서도 관망세로 일관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IB 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대기업들의 자금 여력이 대폭 확충된 상황에서 이 자금 대다수를 성과급 등 소모성 지출로만 흘려보낸다면 3~5년 뒤 반도체 호황기가 끝났을 때 주력 산업 부재에 빠질 우려가 크다”고 경고했다.

업계에서는 한국 대기업들이 리스크 회피 성향에 발목 잡혀 정작 기업과 국가의 장기 생존이 걸린 투자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다고 보고 있다. 한국 대기업들이 AI, 모빌리티, 우주·항공, 방산, 바이오, 첨단화학·소재 등 각자 강점이 있는 분야에서 적극적인 투자처 발굴과 사업 시너지 도모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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