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일본의 행위를 묵인하고 그들과 결탁하여 안락을 누리거나, 아니면 한국 인민의 권리를 옹호하며 그들이 당하고 있는 급증하는 부당함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다. (…)내가 머물러 있을 중간 지대는 없었다.”
미국 선교사 호머 B. 헐버트(1863∼1949) 박사의 선택은 후자였다. 조선의 개화에 기여하고 대한제국의 국권 수호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그에게 한국은 ‘제2의 조국’이었다.
헐버트가 처음 한국에 온 1886년부터 1932년까지 겪은 파란만장한 삶과 국제 정세에 대한 통찰을 담은 회고록이 90여 년 만에 한국에서 출간됐다. 헐버트는 1920년대부터 1932년 말까지 타자기로 회고록을 작성했다. 회고록의 존재는 1994년 한국에 알려졌으며, 2000년에 일부만 영인본으로 발간됐다. 옥성득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석좌교수는 10년 전 컬럼비아대 도서관에 보관돼 있던 원고를 확보해 한국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책으로 펴냈다.
헐버트는 서문에서 “이 책에 기록한 경험은 세상의 이름 없는 구석, 바로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20년 넘게 거주하며 겪은 일”이라고 적었다. 또 “한국은 그 유구한 역사의 영광과 정치적 소멸이라는 비극을 동시에 겪었는데, 이는 전적으로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라며 “한국은 일본이 섬나라에서 대륙 세력으로 진화하기 위해 딛는 첫 번째 발판이 되었다”고 진단했다.
헐버트는 23세이던 1886년 한국 최초의 근대적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초빙돼 조선에 입국했고, 1909년 일제에 의해 추방되기까지 이 땅에 머물렀다. 선교사인 그는 한국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저술한 교육자이자 ‘코리아 리뷰’를 발행하고 ‘독립신문’ 영문판을 만든 언론인, 한글의 우수성에 주목한 언어학자이기도 했다.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에는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고발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왕비는 처소의 한 방에서 구석으로 몰렸고 그곳에서 무참히 살해되었다. 희생자 곁에는 자객들뿐이었기에 누가 치명상을 입혔는지 아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나, 모든 정황은 일본인이 범인임을 가리킨다”고 썼다.
헐버트는 고종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궁궐 침전에서 불침번을 서기도 했다. 회고록에는 고종 황제에 대한 평가도 담겼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한국의 왕(고종)이 집권자로서 어떤 평가를 받든 간에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의 강요에 단 한 번도 자발적으로 굴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의무감에 따라 국가를 정치적 멸망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자신의 힘이 닿는 모든 일을 다했다.”
이후 헐버트는 1905년 을사늑약 저지를 위해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아 미국 워싱턴에 다녀오고,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지원 활동에 나섰다가 일제에 의해 출국당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일본 경찰에게 취조받던 안중근 의사는 “조선 사람이라면 헐버트를 단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평가했다.
헐버트는 1949년 7월 대한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40여 년 만에 한국 땅을 다시 밟았지만, 기관지염으로 8월 서울에서 별세했다. “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됐다.
편역자인 옥 교수는 “일생을 한국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바친 그의 삶은, 전쟁과 독재와 군국주의가 여전한 오늘날의 국제 정세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고 말했다.
푸른역사, 77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