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기울면 눈처럼 하얀 튀르키예 파묵칼레의 석회붕에 붉은 노을빛이 번진다. 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한다. 튀르키예 중부 카파도키아에서는 새벽 하늘을 메운 형형색색의 열기구를 바라보며 사진을 남긴다.
패키지 여행을 선택하는 소비자들의 기준이 ‘얼마나 많은 명소를 찍느냐’에서 ‘한 장소에서 어떤 순간을 보내느냐’로 옮겨가고 있다. 이에 맞춰 여행업계도 ‘버킷리스트 여행’을 새로운 프리미엄 상품으로 선보이고 있다. 단순히 항공과 숙박을 비즈니스석과 특급호텔로 업그레이드하는 데서 나아가 여행자가 오랫동안 상상해온 순간을 여행 일정에 넣는 것이다. ‘일생에 꼭 한 번’이라는 이유로 지갑을 여는 수요를 겨냥했다.
실제로 고가 여행에 대한 수요도 늘고 있다. 글로벌 럭셔리 여행 네트워크 버츄오소(Virtuoso)가 50여 개국 제휴 여행사 소속 여행 자문가 24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26 버츄오소 럭스 리포트(2026 Virtuoso Luxe Report)’에 따르면 응답자의 절반가량이 올해 럭셔리 여행 수요가 소폭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고 18%는 큰 폭의 증가를 예상했다.
노랑풍선의 프리미엄 패키지 브랜드 ‘톱픽(TOP PICK)’은 카파도키아에서 열기구가 집중적으로 떠오르는 새벽 시간에 맞춰 식사와 촬영을 진행한다. 그랜드캐니언과 브라이스캐니언 국립공원에서 하룻밤씩 머물며 일몰과 이튿날 일출을 감상하는 미국 서부 상품도 내놓았다. 관광지에서의 매 순간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이다.
개별 여행객이 혼자 확보하기 어려운 경험을 누리는 것도 여행의 특별함을 높인다. 신세계백화점의 프리미엄 여행 플랫폼 ‘비아신세계’는 전문가와 동행하거나 일반 관광객과는 다른 방식으로 장소를 경험하는 프로그램을 상품에 담고 있다. 대표적으로 10월에는 중식 전문가 정지선 셰프와 홍콩으로 떠나는 미식 여행을 운영한다. 정 셰프와 미쉐린 레스토랑을 찾고 홍콩 와인 앤 다인 페스티벌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음식을 맛보는 데 그치지 않고 정 셰프와 조리법과 식재료, 홍콩 미식의 흐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구성했다.
비아신세계가 준비한 11월 출발 페루·브라질 여행 상품은 마추픽추 유적 입구에 붙어 있는 유일한 호텔인 벨몬드 생추어리 로지에 묵는다. 숙소가 코앞에 위치한 만큼 개장 직후와 늦은 오후에도 마추픽추를 둘러볼 수 있다. 브라질에서는 이구아수 국립공원 안에 숙박하며 거대한 폭포 앞에서 온전히 자연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는다.
여행자가 일정표를 직접 조정할 수 있는 상품도 등장했다. 하나투어의 하이엔드 브랜드 ‘제우스월드’는 고객 요구에 따라 숙박 일수와 출발 시기, 이동 동선을 조정하는 이른바 ‘오더메이드’ 여행을 운영한다. 올해 브랜드를 개편하면서 기존 초고가 맞춤여행은 ‘제우스 프라이빗’으로 두고 프리미엄 패키지와 자유여행까지 상품군을 넓혔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포뮬러원(F1) 관람 상품의 경우 경기 일정에 맞춰 기본 여정을 제시한 뒤 고객이 원하면 체류 기간과 숙박시설을 바꾼다. 스페인에서는 슈퍼카 주행을 중심으로 피레네산맥과 안도라를 잇는 동선을 다시 짤 수 있다. 주로 2~4명이 떠나며 여행 시기와 숙소도 협의를 거쳐 정한다. 하나투어는 슈퍼카뿐 아니라 헬기와 요트, F1 그랑프리 등으로 맞춤여행의 범위를 넓히고 있다.
해외에서는 여행자의 취미뿐 아니라 개인적인 사연과 인연까지 여행으로 만든다. 영국의 맞춤여행사 펠로러스 트래블(Pelorus Travel)은 방 탈출 게임을 좋아하는 6인 가족을 위해 코스타리카를 무대로 실제 보물찾기 여행을 제작했다. 지도와 단서, 이동 경로를 설계해 가족이 여행 내내 게임의 주인공이 되도록 했다.
여행자가 이전부터 관심을 두거나 후원해온 활동도 여행의 출발점이 된다. 케냐의 여성 야생동물 보호 순찰대를 후원한 고객을 위해 현지 순찰대와 보전 활동에 참여하는 일정을 마련하는 식이다. 관광객이 현장을 둘러보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지지해온 활동에 직접 참여하도록 한 것이다.
숙소마저 여행자의 상상에 맞춰 만들어준다. 영미권 고급 여행사 블랙 토마토(Black Tomato)의 여행상품 ‘블링크(Blink)’는 파타고니아와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사막 등 외딴곳에 고객 한 팀만을 위한 임시 숙소를 설치한다. 고객이 원하면 이동식 스파를 만들거나 마사지사를 배치한다. 여행이 끝나면 숙소는 철거한다. 기존 호텔에서 가장 좋은 객실을 고르는 대신 여행자가 꿈꿔온 장소에 숙소를 새로 세우는 것이다.
여행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좋은 항공 좌석과 특급호텔 객실을 확보하는 것이 프리미엄 여행의 핵심이었다면 이제는 고객이 꿈꿔온 장면을 실제 일정으로 구현하는 능력이 중요해졌다”며 “특정 인물과 장소를 연결하고 개별 여행객이 해결하기 어려운 허가와 이동 문제까지 풀어주는 것이 여행사의 경쟁력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