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820조 9000억 원에 이르는 내년 예산안을 공개하면서 우리나라도 미국·중국·일본 등과 함께 본격적으로 확장재정 경쟁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올해 본예산 대비 내년 총지출 증가율은 12.8%에 달해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10.6%) 기록을 갈아치웠다.
일회성 확장재정도 아니다. 정부는 2030년까지 연평균 지출 증가율을 8.4%로 잡았다. 2030년이 되면 총지출이 1005조 2000억 원에 달해 ‘예산 1000조 원’ 시대를 열게 된다. 이재명 정부 5년 동안 늘어나는 총지출 증가액은 약 332조 원으로 박근혜·문재인·윤석열 3개 정부 때 불어난 지출 증가액(348조 원)과 맞먹는다.
이 같은 확장재정이 가능한 것은 반도체 초호황이 벌어들이는 세수 덕분이다. 정부는 내년 국세수입이 올해(390조 2000억 원)보다 194조 2000억 원 늘어난 584조 4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550조 원 안팎이던 시장 전망치를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문제는 반도체 초호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실제 정부 살림살이를 뜻하는 관리재정수지는 적자 규모가 올해 107조 8000억 원에서 내년 3조 1000억 원으로 급감했다가 2030년 100조 8000억 원까지 다시 가파르게 확대된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적자 비율도 내년 0.1%에서 2030년 2.9%로 올라 정부의 중기 관리 목표인 3% 선에 바짝 다가선다. 총지출은 앞으로도 꾸준하게 늘어나는 반면 총수입은 늘어나는 속도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조용범 기획예산처 차관은 “반도체 세수가 계속된다고 전제할 수 없다”며 “총지출 증가율을 단계적으로 낮췄다”고 설명했다. 다만 정부 전망은 세수 증가율을 낮춰 잡았을 뿐 내년 급증한 세수의 절대 규모가 이후 감소하는 경우까지 반영하지는 않았다. 국세수입은 올해 본예산보다 49.8% 늘어난 뒤 2030년까지 매년 증가하는 것으로 돼 있다.
특히 이번 중기 전망은 투자 성과가 늦어지거나 반도체 경기가 꺾일 때를 가정한 비관적 시나리오가 아니라 정부가 제시한 기본 경로다. 성장 효과가 예상보다 늦게 나타나면 관리재정수지 적자를 GDP의 3% 이내로 묶겠다는 목표부터 흔들릴 수 있다.
국가채무는 내년 1519조 8000억 원에서 2030년 1734조 1000억 원으로 늘어난다.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같은 기간 48.3%에서 49.0%로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이는 실질 성장률 2%와 물가 흐름을 반영한 명목 GDP가 계획대로 늘어난다는 전제에 기반한다.
내년 국고채 총발행 규모는 222조 8000억 원으로 올해 계획보다 2조 9000억 원 줄어든다. 적자국채 등을 포함한 순증 발행은 96조 3000억 원으로 13조 1000억 원 감소하지만 만기 상환용 발행은 110조 7000억 원으로 20조 2000억 원 늘어난다. 새로 늘어나는 빚은 줄어도 기존 국채를 갚기 위한 차환 수요가 커지면서 총발행 규모는 220조 원대를 유지하는 셈이다. 최근 국고채 금리가 급등하는 것도 부담이다. 이날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연 3.878%로 마감해 지난해 말 연 2.953%보다 0.925%포인트 급등했다.
결국 우리나라 재정은 제2의 반도체를 키워낼 수 있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4~5년 뒤 반도체 산업이 본격 하강 사이클에 접어든다고 가정했을 때 이 충격을 견뎌낼 산업이 있느냐에 나라살림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세수가 좋을 때 관리재정수지를 흑자로 만들고 국채 부담을 더 낮췄다면 재정 불안이 커진 선진국들과 차별화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