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베이징에서 만난 한 한국인 엔지니어와의 대화가 기억에 오래 남아 있다. 국내 유수 기업에서 중국 자율주행 기업으로 옮긴 30대였다. 중국 시장과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이직 이유를 물었다. 그는 여러 이유 중 하나로 뜻밖에도 주 52시간제를 꺼냈다. “일할 수 있을 때 밀도 있게 일해 성과를 내고 그만큼 보상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원해도 몰입해서 일하기 힘든 구조였습니다.”
한 사람의 경험을 산업 전체의 문제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이직에는 보상, 기업문화, 성장 가능성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그럼에도 그의 말을 흘려듣기 어려웠던 것은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제도가 일부 전문인력에게는 역량을 발휘하는 데 제약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전한 중국 첨단기업의 풍경은 치열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짧은 기간 조직 전체가 집중하고, 성과에 대한 보상도 확실하다고 했다. 물론 중국식 장시간 근로문화를 본받자는 얘기가 아니다. 장시간 노동 자체가 경쟁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근로자의 건강과 삶을 보호한다는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첨단산업의 경쟁 방식이 달라졌다면 일하는 방식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 AI·반도체·로봇·자율주행 분야에서는 기술개발과 시장 선점의 속도가 어느 때보다 빨라졌다. 몇 달, 때로는 몇 주 먼저 기술을 확보하느냐가 시장의 승패를 좌우한다. 개발의 결정적 시기에는 연구진이 짧은 기간 몰입해야 할 때가 있다. 연구자의 몰입과 창의성을 일률적인 ‘시간의 잣대’로만 규제하기에는 혁신의 시계가 너무 빠르다.
더 근본적인 질문도 있다. 더 일하고 성취해 그만큼 보상받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왜 그 선택권마저 일률적으로 제한해야 하는가. 보호가 필요한 근로자에게 안전망을 제공하는 것과 높은 전문성과 자율성을 가진 인력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것은 양립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메가특구특별법’ 논의는 중요한 시험대다. 본인 동의를 전제로 첨단산업 연구개발 인력의 근로시간 규제를 유연화하는 방안 등이 논의되고 있다. 이들에 대해서는 자발적 선택과 충분한 보상, 건강권 보호가 전제된다면 필요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필요가 있다.
물론 현행 특별연장근로 제도를 활용하면 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 제도는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 근로자 동의와 정부 인가 등 별도의 절차를 거쳐 예외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이어서 R&D 현장의 다양한 수요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첨단 R&D는 갑작스러운 고객 요구나 인증 일정, 기술적 난관 등으로 상황이 급변하는 경우가 많다. 필요한 순간에 신속하고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이 절실하다. 문제의 본질은 몇 시간 더 일하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프로젝트의 특성과 개인의 선택에 맞게 일하는 방식을 설계할 수 있느냐에 있다.
이 문제를 노동정책의 틀에만 가둬서도 안 된다. 첨단산업 경쟁력과 국가 인재 확보가 걸린 만큼 산업·과학기술·인재 정책을 아우르는 범정부 차원에서 지혜를 모아야 한다. 메가특구법 논의를 그 출발점으로 삼았으면 한다.
첨단산업의 승패는 결국 인재가 가른다. 인재를 길러내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뛰어난 인재들이 한국에서 마음껏 도전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일이다. 이제 ‘얼마까지만 일하게 할 것인가’를 넘어 ‘어떻게 해야 뛰어난 인재들이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30대 한국 엔지니어가 중국으로 떠난 까닭을 우리 사회가 곱씹어봐야 하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