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방산업체 A사는 육군 교육사령부의 전투실험 과제를 수행하던 중 로봇에 사용하던 기존 통신장비를 통째로 교체했다. 상반기 두 차례 진행한 전투실험의 후속 과제였는데도 하반기 실험에서 요구하는 통신 규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주파수와 보안 수준 등 요구 조건이 바뀌면서 이에 맞는 통신장비를 새로 확보하고 로봇과 연동하는 작업도 다시 거쳤다.
군이 로봇과 드론 등 유·무인 복합체계 도입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정작 이들 장비에 적용할 통신·보안 모듈의 공통 규격은 마련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이 군용 통신장비 개발에 선제적으로 투자하기 어려운 가운데 드론·통신체계 등 민간 기술을 국방 부품으로 연계할 수 있는 비중도 10%에 그쳤다.
27일 방산업계에 따르면 현재 로봇·드론 등 무인체계에 공통으로 적용할 수 있는 군 통신·보안 모듈 규격은 부재한 상황이다. 군과 사업마다 요구하는 주파수와 통신 방식, 보안 수준 등이 달라 방산 기업들은 개발·실증 과정에서 건건이 요구사항에 맞춰 대응해야 한다. 암호모듈의 안전성을 검증하는 암호모듈검증제도(K-CMVP)가 마련돼 있지만 국방 사업 전반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의무 기준이나 표준 규격은 없다.
공통 규격이 없다 보니 국내 기업의 군용 통신장비 개발에도 제약이 따른다. 기업이 먼저 제품을 개발하더라도 향후 군이 제시하는 규격과 맞지 않으면 투입한 연구개발비와 시간이 그대로 손실이 된다. 사업마다 요구 조건이 달라 기존 장비를 수정하거나 새로 개발해야 하는 부담도 발생한다. 한 드론업체 대표는 “기업 입장에서는 지금 통신장비를 만들어도 이후에 규격이 정해지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며 “군이 먼저 규격을 제시해야 기업도 그에 맞춰 개발에 투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드론·통신체계 분야에서 민간 기술을 국방 부품으로 활용할 수 있는 비중도 낮은 수준이다. 국방기술진흥연구소가 발간한 국방기술진흥연구소의 ‘2025 국방활용가능 민간보유기술 조사서’를 보면 국방 활용 가능성이 있다고 분류된 민간 기술 168건 가운데 통신체계나 소형·정찰용 드론 분야의 부품국산화 사업과 연계할 수 있는 기술은 18건, 10.7%에 그쳤다. 168건을 전체 국방 분야로 넓혀 살펴봐도 부품국산화 사업과 연계되지 않은 기술이 100건에 달해 실제 부품을 국산화할 수 있는 경우는 제한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산 개발이 더딘 사이 군용 통신장비는 외산 의존이 굳어지고 있다. 국내 무인체계 개발·실증 현장에서는 미군이 채택한 실버스테크놀로지스의 ‘스트림캐스터’, 퍼시스턴트시스템스의 ‘MPU5’ 등이 주로 쓰인다. 성능과 보안성이 검증된 장비를 바로 도입할 수 있다는 이점은 있지만, 의존이 고착되면 국내 기업의 통신·보안 기술 축적과 산업 생태계 조성이 어려워진다는 우려가 나온다.
군이 소형 드론을 대규모로 보급하기 시작하면서 저비용 통신·보안 모듈 확보는 더 급해졌다. 국방부는 ‘50만 드론전사’ 계획에 따라 드론 운용 인력을 늘리고 국산 상용드론의 대규모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교육·훈련 등에 활용되는 소형 드론은 기체 가격이 수백만 원 수준인 데다 교체 주기도 짧아 대당 수천만 원에 달하는 기존 군용 통신장비를 적용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에 국산 통신·보안 모듈을 개발하고 무인체계에 범용으로 적용할 수 있는 공통 규격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최기일 상지대 군사학과 교수 겸 한국방위사업연구소장은 “K-CMVP 등 기존 보안 기준을 토대로 무인체계에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기준을 구체화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며 “기업의 개발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단계별로 적용하되 기본적인 통신·보안 가이드라인은 군 차원에서 통일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군도 대응에 나섰다. 국방부는 공통 표준 기술을 적용한 무인체계 확보를 목표로 모듈화·공통화·개방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올해 ‘유·무인복합체계 공통데이터링크’ 핵심기술 연구개발 사업에 착수할 계획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공통데이터링크 표준과 보안을 확보한 통신시스템 기술을 개발하고 기술 적용을 위한 전용 주파수도 확보할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