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배임 혐의로 기소된 사실을 공시한 뒤 투자를 늘리기보다 현금을 쌓는 쪽으로 재무 전략을 바꾸는 경향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다는 부담이 커지면 기업이 새로운 사업이나 투자처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의사결정을 피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경제인협회는 26일 지인엽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에게 의뢰한 ‘배임죄 적용이 기업의 위험회피 성향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를 공개했다.
연구진은 2016년부터 올해까지 배임 기소 사실을 공시한 상장사 119곳의 재무자료를 분석했다. 그 결과 배임 기소 사실을 공시한 분기에는 기업의 현금보유비율이 직전 분기보다 1.7%포인트 높아졌다. 이후 상승 폭은 더 커져 1분기 뒤 3.1%포인트, 7분기 뒤에는 5.4%포인트에 달했다. 분석 대상 기업의 평균 현금보유비율이 12.0%였던 점을 감안하면 5.4%포인트 상승은 상당히 큰 수치라는 해석이다.
현금보유비율은 기업이 가진 전체 자산 가운데 현금과 현금성 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이다. 기업이 보유한 자산 가운데 당장 꺼내 쓸 수 있는 현금이 얼마나 되는지를 보여준다.
한경협은 이를 배임 기소 이후 기업들이 돈을 적극적으로 투자하기보다 안전한 현금으로 보유하려는 성향이 강해진 결과로 해석했다. 현금은 대표적인 저위험 자산이다. 기업은 보통 투자계획과 자금조달 일정 때문에 현금 보유 규모를 단기간에 크게 바꾸기 어렵다. 그런데 기소 뒤 현금 비중이 상당 기간 높아졌다는 것은 재무정책 자체가 보수적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한경협은 배임죄의 모호한 적용 기준도 기업 경영의 불확실성을 높이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2015~2024년 배임·횡령죄의 1심 평균 무죄율은 6.2%로 전체 형사사건 평균인 3.0%의 두 배를 웃돌았다.
처벌 수준도 문제로 꼽았다. 한국은 배임으로 얻은 이득이 50억 원 이상이면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에 따라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다.
보고서에서는 미국과 영국에는 별도의 배임죄 규정이 없고 독일과 일본도 경영자의 합리적인 판단을 폭넓게 보호하는 경영판단원칙을 적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영판단원칙은 경영자가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절차를 거쳐 결정을 내렸다면 결과적으로 회사가 손해를 보더라도 곧바로 책임을 묻지 않는 제도다. 기업이 새로운 사업에 투자할 때 결과를 미리 알 수 없는 만큼 정상적인 실패와 고의적인 배임을 구분할 장치가 필요하다는 취지다.
이상호 한경협 경제본부장은 “배임 기소가 최종 유·무죄 판단과 무관하게 기업의 혁신과 투자활동을 위축시킬 소지가 있음을 실증적으로 확인한 것”이라며 “배임죄 구성요건을 명확히 하고 경영판단원칙을 법률에 명문화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