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뉴스는 지나갔지만, 그 의미는 오늘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의 그날’은 과거의 기록을 통해 지금을 읽습니다.〈편집자주〉
“국민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며 죽는 게 억울하다.”
55년 전 오늘인 1971년 8월 23일 인천 실미도의 새벽. 북파공작원으로 훈련받던 군인들이 교관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면서,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하루가 시작됐다.
실미도의 새벽, 부대원들의 봉기
이야기의 출발점은 실미도 사건 발생일보다 3년 앞선 1968년 1월 2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와대를 습격하려다 붙잡힌 무장공비 김신조는 침투 목적을 묻는 질문에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답해 온 국민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그해 4월, 김일성 암살을 목표로 한 공군 산하 684부대가 출범했다. 31명의 부대원은 인민군식 훈련을 받으며 단 3개월 만에 실전 투입이 가능한 인간병기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3년 4개월이 지나도록 출동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7·4 남북공동성명 등으로 남북관계가 급변하며 북파 계획 자체가 무산됐다. 예산이 줄어 봉급을 주고 보급품을 사기도 빠듯해졌다. 교관과 조교가 잇달아 바뀌면서 부대원들 사이엔 불안감이 커졌다. 급기야 “보안 유지를 위해 부대원들을 몰살시킬 수 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퍼졌다.
결국 1971년 8월 23일 오전 6시께 완전 무장한 부대원 24명은 교관과 조교들을 살해하고 부대를 이탈했다. 인천 해안에 상륙, 시내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를 향해 질주했다. 실미도에서 이미 1명이 숨진 뒤라 버스에 오른 인원은 23명이었다.
무장한 군인들이 버스를 몰고 서울로 진입한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확산했다. 정부는 이들을 ‘무장공비’로 규정하고 대응에 나섰다. 서울 동작구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육군과 경찰에 포위된 부대원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결국 버스 안에서 수류탄이 터졌다. 19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4명은 크게 다친 채 붙잡혔다.
침묵 속 사형, 암매장된 유해
살아남은 임성빈·이서천·김창구·김병염 등 4명을 기다린 건 관용이 아니었다. 군은 국회 진상조사를 앞두고 이들에게 “보안상 절대 말할 수 없다고 답하면 (너희들은) 살 수 있다”며 종용했고, 이들은 야당 의원들의 질문에도 “비밀사항이라 말씀드릴 수 없다”며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침묵의 대가는 가혹했다. 4명은 1972년 1월 군사재판에서 나란히 사형을 선고받았고, 상고 한 번 하지 못한 채 사건 발생 7개월 만인 그해 3월 10일 형장에서 삶을 마감했다.
이들이 남긴 마지막 말은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김병염은 “살아 생전 국가에 대해 말도 못하고 죽는 게 아깝다. 제가 죽더라도 집에 알리지 말아달라”고 했다. 임성빈은 “바다 한복판 섬에서 부모를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만 3년 동안 외롭게 지내다 김일성의 목을 베지 못하고 죽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창구는 “3남매 아이들이 제일 불쌍하다. 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이서천은 애국가를 부른 뒤 “국가를 위해 싸우지 못하고 국민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며 죽는 게 억울하다”고 토로했다.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됐다. 국방부는 사형 집행 사실조차 유족에게 알리지 않은 채 시신을 몰래 묻었다.
55년의 진실규명, 끝나지 않은 사과
사건이 다시 소환된 건 반세기가 지난 뒤였다. 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2022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잇달아 암매장 등 인권침해 사실을 확인하며 국가 차원 사과를 촉구했다.
국방부는 2023년 사과 방침을 정했다. 2024년 10월 15일 경기 고양시 벽제묘지 개토제 현장에서 유균혜 군인권개선추진단장이 김용현 당시 국방부 장관의 사과문을 대독했다.
김 장관은 사과문에서 “국방부는 실미도 사건으로 희생된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 여러분들께서 겪으신 그간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깊은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그러나 암매장된 4명의 유해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국방부는 올해 5월 벽제묘지공원 5-2구역을 두 차례 파헤쳤다. 6월에는 오류동 옛 공군정보부대 터인 개웅산 일대로 자리를 옮겨 찾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지난 8월, 이재명 대통령은 청와대 영빈관에서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초청해 위로 오찬을 열고 “해방 이후 이 땅에서 벌어진 모든 국가폭력 사건 피해자들께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언급했다.
실미도의 북파공작원들은 국가가 만들어낸 존재들이었지만, 쓸모가 다하자 이름도 없이 땅에 묻혀야 했다. 55년 전 오늘 실미도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아직도 찾지 못한 유해와 함께 여전히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갑자기 북한을 조선으로 부른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