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현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장 부회장이 최근 반도체 사업 경영진들에게 “아직 갈 길이 멀다”며 강도 높은 내부 기강 잡기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삼성전자가 HBM4를 앞세워 추월에 성공하고 사상 최대 실적까지 거두면서 내부에 자신감이 확산하자, 오히려 ‘자만’을 가장 큰 위험 요인으로 지목한 것입니다.
16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전 부회장은 최근 내부 경영진 회의에서 삼성전자(005930) 의 HBM 경쟁력 회복을 언급하면서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특히 HBM 경쟁에서 SK하이닉스(000660) 를 추월한 것을 성과로 평가하는 내부 분위기에 대해서 “삼성전자가 언제부터 SK하이닉스를 이기는 것을 목표로 일했느냐”고 강하게 질타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삼성전자는 HBM3와 HBM3E 시장에서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내주며 한동안 ‘메모리 최강자’의 자존심을 구겼습니다. 실제로 2025년 상반기까지 글로벌 HBM 출하량 기준 점유율은 SK하이닉스가 62%에 달했습니다. 삼성전자는 17%로 3위 마이크론(21%)에도 밀리면서 메모리 기술 리더십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커졌습니다.
하지만 전 부회장이 2024년 초 미래사업기획단장으로 삼성전자에 복귀하고, 같은 해 5월 DS부문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반전이 시작됐습니다. 전 부회장은 ‘근원적 경쟁력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했습니다. 특히 HBM 개발 과정에서 “경쟁사의 기술과 제품을 따라가는 방식으로는 시장 주도권을 되찾을 수 없다”며 삼성만의 기술 경쟁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왔습니다.
그 결과 삼성전자는 올 2월 HBM4 양산과 고객사 대상 상용 제품 출하를 시작하며 업계 최초 상용화에 성공했습니다. 삼성전자의 HBM4는 최대 1초당 13기가비트(Gbps)까지 성능내며 경쟁사들을 압도했습니다. HBM3E에서 경쟁사를 추격하던 삼성전자가 차세대 제품에서는 가장 먼저 상용화에 나서면서 기술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셈입니다.
하지만 전 부회장은 HBM4 성과를 경쟁력 회복의 ‘완성’이 아닌 ‘출발점’으로 보고 내부 기강을 다시 다잡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전 부회장은 HBM4 하나를 잘했다고 해서 삼성 반도체가 과거의 경쟁력을 모두 되찾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며 “HBM4는 시작일 뿐이고 HBM5·6·7으로 세대가 바뀌더라도 경쟁사가 쉽게 따라오기 어려운 기술 격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전 부회장의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경쟁 상황은 녹록지 않습니다. 경쟁사들은 반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는 6월 주요 고객사에 최대 16Gbps 속도를 구현한 12단 HBM4E 샘플을 공급했다고 밝혔습니다. 마이크론도 맞춤형 HBM4E를 두고 고객사들과 협업을 진행하며 2027년 양산 확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엔비디아의 베라 루빈(Vera Rubin)용 12단 HBM4를 양산하는 동시에 16단 HBM4 샘플까지 고객사에 공급하며 차세대 HBM 경쟁에 가세했습니다.
전 부회장은 최근 삼성전자의 기록적인 실적에 대해서도 냉정한 평가를 내린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삼성전자는 올해 2분기 매출 171조 5000억 원, 영업이익 89조 5000억 원으로 분기 기준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DS부문에서만 매출 127조 5000억 원, 영업이익 89조2000억 원을 거두며 사실상 전체 이익을 반도체가 책임졌습니다.
그럼에도 전 부회장은 최근 경영진에게 “냉정하게 보면 지금 실적에서 우리의 실력이 기여한 부분은 30% 정도”라고 평가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나머지 70%가량은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 확대와 이에 따른 메모리 공급 부족, 가격 상승 등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영향이라는 것입니다.
시장의 평가도 결을 같이 합니다. 삼성전자는 2분기 실적 발표에서 AI 인프라 투자 확대에 따른 서버용 메모리 수요 증가로 인해 업계 전반의 가격 상승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에 메모리 사업이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는 설명입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도 삼성전자의 2분기 기록적인 실적에 메모리 가격 급등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지난해 말에도 전 부회장은 비슷한 경고를 했습니다. 당시 메모리 업황 개선에 대한 낙관론이 확산하자 임직원들에게 “경쟁사를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내부 단속에 나섰습니다. 실적 회복 자체보다 근본적인 기술 경쟁력 복원이 우선이라는 점을 역설한 것입니다.
전 부회장이 다시 ‘위기론’을 꺼내 든 것은 삼성 반도체의 목표가 단순히 SK하이닉스를 추월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과거 삼성전자가 메모리 시장에서 구축한 경쟁력의 본질은 특정 제품이나 한 세대에서의 성능 우위에 있지 않았다는 진단입니다. 결국 공정·설계·수율·생산능력 전반에서 경쟁사를 지속적으로 압도하는 ‘초격차’를 회복하기 전까지는 작은 성공에 도취돼서는 안 된다는 지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