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 재판에는 ‘조정’이라는 제도가 활성화돼 있다. 승패를 가르기보다 서로 한 걸음씩 물러나 타협점을 찾는 절차다. 법원은 이를 통해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분쟁을 조기에 끝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최근 이러한 조정의 정신이 절실히 요구되는 곳이 있다. 장기화하고 있는 대법관 공백 사태다. 노태악 전 대법관은 올 3월 퇴임했다. 퇴임 한 달 전 후임 대법관 후보 4명이 추천됐지만 이후 절차는 멈춰 섰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후보자 제청을 미루면서 노 전 대법관의 자리는 5개월째 공석으로 남아 있다. 30년 넘게 법관으로 근무한 법원 관계자조차 “전무후무한 일”이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정도다. 이런 가운데 사법부는 9월 퇴임하는 이흥구 대법관의 후임 인선 절차까지 진행하고 있다.
제청 지연 배경에는 청와대와 사법부 간의 시각 차이가 있다. 헌법은 대법관 제청권을 대법원장에게 부여하지만 최종 임명권은 대통령에게 맡겨 두고 있다. 관례적으로 양측은 후보를 놓고 의견을 조율해 왔지만 이번에는 그 과정이 순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로서는 첫 대법관 인선인 만큼 국정 철학을 반영하려는 고민이 깊을 것이다. 반면 사법부는 제청권의 독립성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어느 한쪽의 논리만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국정 철학의 반영도, 사법부 독립도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두 가치가 충돌하는 동안 발생한 사법 공백의 피해는 국민 몫이 된다. 2024년 기준 대법관 한 명이 한 달 평균 처리한 사건은 약 382건이다. 한 자리가 비면 소부 운영은 물론 전원합의체 심리 전체가 차질을 빚는다. 이는 단순한 인사 지연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와 직결된 문제다.
법원이 당사자들에게 조정을 권하는 까닭은 승패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분쟁의 조속한 종결과 일상의 회복이다. 원칙을 지키는 고집은 미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고집이 소통을 막는 아집으로 변하는 순간 타협은 사라지고 갈등은 고착화된다. 대법관 제청도 다르지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한쪽의 완승이 아니다. 법원이 늘 당사자에게 권해온 ‘조정의 정신’이다. 서로 한 걸음씩 물러나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