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오후 8시 상하이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인 장장과학성. 이곳 내부에 자리잡은 중국 CXMT의 패키징 자회사인 신푸톈잉을 방문해보니 이미 퇴근 시간이 넘었는데도 사무동 건물 대부분에는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직원들을 실어나르는 통근버스가 늦은 시간까지 잇따라 드나드는 가운데 신푸톈잉 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도 끊임없이 눈에 띄었다.
중국 메모리 반도체 1위 기업인 CXMT는 이곳에서 1시간가량 떨어진 린강신구에도 웨이퍼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이 공장이 가동에 들어가면 CXMT의 생산능력은 2030년까지 현재의 두 배 수준으로 늘어나 미국 마이크론도 넘어서게 된다. 범용 D램 공급 확대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수익성에도 직접적인 타격을 줄 가능성이 제기된다.
CXMT의 성공은 중국 반도체의 도전을 그대로 기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CXMT는 자신들이 2016년 ‘스타트업’으로 출범했다고 스스로 소개하고 있다. 일본·독일 등 제조업 강자들도 버티지 못했던 약육강식의 시장에서 CXMT는 2018년 최초의 더블데이터레이트(DDR)4 제품을 개발해낸 데 이어 현재는 최선단 메모리인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에 도전할 정도로 기술 수준을 끌어올렸다.
이미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는 ‘레드팹’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중국이 7㎚ 이하 선단 공정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고 있지만 범용 반도체 시장에서는 존재감을 키우면서 시장을 무서운 속도로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2일 중국통계국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반도체 업계가 생산한 집적회로(IC)는 총 4842억 8000만 개였다. 2015년만 해도 연간 생산량이 1087억 2000만 개였는데 10년 새 생산량이 350% 가까이 폭증했다. 중국 반도체 업체들의 첨단 제품 기술 추격 속도도 무섭지만 성숙 공정에서도 물량 공세가 상당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실제 미국 반도체 협회(SIA)가 지난해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제출한 의견서에 따르면 2015년 중국의 성숙 공정 반도체 생산 설비는 전 세계의 19% 수준이었지만 2023년에는 33%까지 확대됐다. 이 기간 세계 반도체 생산력 증가분의 72%를 중국이 차지하고 있어 벌어진 일이다. SIA는 “생산 측면에서 중국은 글로벌 반도체 전 공정 제조 설비의 20%, 후공정 제조 설비의 40%를 차지하는 나라”라며 “소비 측면에서도 전 세계 전자제품의 3분의 1이 중국에서 만들어져 반도체 생태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미 상무부 산업안보국(BIS)가 연간 매출 3조 달러가 넘는 반도체 수요 기업들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미 미국 자동차, 가전제품, 산업 기계, 국방 분야 곳곳에 중국산 반도체가 광범위하게 침투하고 있다. 이들 기업의 제품 가운데 중국산 반도체가 전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 경우는 전체의 17%에 불과했다. 조사 대상 제품의 44%는 중국산 반도체가 사용됐는지 여부조차 파악이 어려운 것으로 드러났다. 전자통신 장비에는 다양한 반도체가 부품이 복합적으로 활용되는 탓이다.
메모리 분야에서 압도적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는 한국도 중국의 도전이 서서히 실존적 위협이 되고 있다. 국내 반도체 기업의 한 고위 관계자는 “DDR5나 HBM과 같은 선단 제품도 물론 중요하지만 범용칩이 벌어들이는 수익도 대체로 절반가량은 차지한다”며 “과거에는 치킨게임으로 범용칩에서 돈을 벌어 선단 제품에 투자했지만 이제는 이런 성공 공식이 통하기 어려운 처지”라고 설명했다. 반도체 시장에서 우리가 버티고 있는 발판이 점차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이에 따라 중국이 태양광 패널이나 전기차 시장, 범용 반도체 시장을 독점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산업도 우리나라가 2위 자리를 조만간 중국에 내줄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도 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그래픽처리장치(GPU)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에 들어가는 핵심 칩은 손톱만 한 면적에 방대한 연산능력을 보유해야 해 고도의 집적률이 관건이지만 산업용 전력반도체·센서·라이다 등은 저렴하고 튼튼한 것이 최우선”이라며 “성숙 공정에서도 다양한 반도체 수요가 있는데 한국은 과도하게 첨단 공정에만 이목이 집중돼 있다”고 비판했다.
김정호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다른 산업을 떠나서 에너지저장장치(ESS)와 AI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전력반도체만 해도 수요가 막대하다”며 “지금은 주로 독일과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는데 국내 생산 기반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부산을 전력반도체 소부장 특화 단지로 지정해 관련 기업을 지원하고 있지만 대량 양산 설비가 아니어서 한계가 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진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