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냥 반도체 축배에 취할 때가 아닙니다. ‘반도체판 플라자합의’가 안 나올 것이라는 보장이 없어요.”
최근 만난 금융권의 한 고위 관계자는 반도체 경기에 대한 과도한 긍정론이 염려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4755조 원 투자, 내년 100조 원 추가 세수’ 등 실감조차 어려운 숫자들이 확정된 미래인 양 인식되고 반도체 호황을 전제로 장밋빛 성장률 전망만이 나오는 점을 우려했다.
무엇보다 한국이 독식하는 반도체 호황을 미국 등이 두고만 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40여년 전 일본의 사례를 들면서다.
실제로 1980년대 일본 기업들이 세계 반도체 시장을 휩쓸면서 미국이 경쟁력을 잃어가자 미 정부는 일본에 엔화 절상을 유도하는 플라자합의와 미일 반도체 협정을 밀어붙였다. 이에 일본 D램의 가격 경쟁력이 악화됐고 NEC·도시바 등 일본 기업은 글로벌 반도체 주도권을 상실했다. 일본 반도체 산업의 쇠퇴가 미국 때문이었다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어도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이 통상 압박을 적극 활용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의 반도체 슈퍼사이클에서 한국 기업들이 앞서가고 있는 것에 안심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세계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미국 기업과의 경쟁 구도가 심화된다면 새로운 통상 규범이나 산업 정책, 공급망 재편 요구가 등장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반도체판 플라자합의’ 일지 다른 방식의 정책 압력일지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첨단 산업일수록 외교와 통상의 영향을 함께 받는 시대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는 “우리나라 반도체 경기가 역대급이라고 뽐내면 뽐낼수록 미국 정부의 직접적 타깃이 될 수 있다”며 “특히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예측 불가능성을 고려할 때 한국 정부가 나서서 성과를 과시하는 것은 매우 안이하고 위험한 태도”라고 말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잘났다고 과시할수록 상대방의 반발심과 경계심은 커지기 마련이다. 한국의 반도체가 날개를 달수록 미국은 관세를 높이거나 방위비 증액 등 다른 분야에 압박을 가할 수 있고 이로 인해 우리나라는 통상에서 협상 지렛대를 상실할 수도 있다.
정부는 단기 성과에 도취하기보다 미증유의 글로벌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 기업들이 고립되지 않도록 조용히 판을 깔아주고 든든한 방파제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한국 반도체를 규제하면 중국이 반사이득을 얻어 미국이 쉽게 압박에 나서지 못할 것이라는 반론도 있지만 국제 통상은 예측 불가능한 영역이다. 최악을 가정하고 어떤 시나리오에도 흔들리지 않을 대응력을 갖추는 데 정부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리스크는 언제나 호황의 한복판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호황이 끝난 이후에도 세계 시장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도록 묵묵히 지원하는 정부가 필요한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