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인트호번 중앙역을 나오자 길 건너 옛 공장 옥상의 ‘필립스(PHILIPS)’ 간판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필립스가 떠난 지 오래지만 도시 한복판에 남은 간판은 한때 이곳을 움직인 주인이 누구였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줬다. 달라진 것은 간판 아래였다. 하나의 기업을 위해 돌아가던 공장 건물에는 이제 학교와 연구소·스타트업과 첨단기술 기업이 층층이 들어서 있었다.
1891년 에인트호번에서 백열전구 생산을 시작한 필립스는 일자리뿐 아니라 주택과 학교·병원까지 공급했다. 에인트호번은 사실상 필립스 한 곳이 먹여 살리는 도시였다. 공장과 연구소가 도심에 자리 잡았고 도시의 성장도 필립스의 확장과 궤를 같이했다.
위기는 필립스가 흔들리면서 찾아왔다. 일본 전자 기업의 저가·고품질 공세와 시장 수요에서 벗어난 기술 중심 경영이 겹치며 필립스는 1990년 한 해에만 23억 달러의 적자를 냈다. 대규모 공장이 문을 닫고 전체 인력의 20% 이상이 일자리를 잃었다. 1998년 본사마저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가자 도시에는 ‘필립스가 떠난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라는 과제가 남았다.
에인트호번은 곧바로 상가와 아파트부터 짓지는 않았다. 먼저 폐공장을 창작자에게 열어 사람이 찾아올 이유를 만들었다. 핵심 무대는 필립스의 옛 생산·연구단지 스트레이프S였다. 필립스가 2002년 27만 ㎡ 부지를 매각하자 시와 민간은 각각 50%를 출자해 특수목적법인 ‘파르크 스트레이프 베헤이르’를 설립했다. 이 법인이 부지 개발과 관리를 맡아 2028년까지 5단계 장기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첫 단추는 수익성이 높은 주거·상업시설이 아니었다. 필립스의 필터 공장이었던 ‘클록허바우’를 청년 예술가들의 저렴한 작업실과 음악 스튜디오로 개방했다. 창작자들이 들어오자 더치디자인위크와 미디어아트·테크 축제가 뒤따랐다. 회색 공장지대에 디자인과 기술, 젊은 문화가 덧입혀지면서 쇠퇴의 상징이던 장소의 이미지가 달라졌다.
사람의 흐름이 바뀌자 기업도 움직였다. 방문객이 늘고 디자이너와 개발자가 머물기 시작하자 이들과 협업하려는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이 입주했다. 이후 중견기업과 연구기관도 합류했다. 문화가 산업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기업과 일자리를 끌어들이는 마중물이 된 것이다.
지난달 22일(현지 시간) 스트레이프S 안에서 찾은 창의·기술 전문학교 신트뤼카스에서는 학생들이 인근 기업 관계자들과 디자인·기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학교와 기업 사무실이 같은 단지 안에 있다 보니 수업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 개발로 곧바로 이어지는 구조다.
이곳은 이미 새로운 기업의 성장 사다리 역할도 했다. 과거 필립스 기계 공장 건물은 ASML의 초기 성장 터전이 됐고 보쉬도 본사 이전 초기 이곳에 입주했다. 현재 스트레이프S에 들어선 기업은 1000개가 넘으며 스타트업과 스케일업만 250개 이상이다. 그 사이 공원과 학교, 스튜디오, 약 2250세대 규모의 주거 공간도 단계적으로 조성됐다.
비어 있던 공장에서 발생한 임대수익은 다시 주거와 교육·교통·공공시설에 투입됐다. 사람을 불러 장소의 가치를 높이고 기업 입주로 확보한 수익을 다시 지역에 넣는 구조다. 필립스 한 곳에 의존했던 과거와 달리 여러 기업과 교육·연구기관이 서로 인재와 기술을 주고받으며 성장하는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성과는 스트레이프S 밖으로도 번졌다. 필립스 본사가 떠난 1998년 19만 8339명이던 에인트호번시 인구는 2025년 24만 9035명으로 약 26% 증가했다. 에인트호번을 포함한 브레인포트 지역의 일자리는 최근 10년간 20.5% 늘었고 첨단 시스템·소재 산업 일자리는 2012년 이후 45.9% 증가해 2024년 8만 9058개에 달했다. 지역 총생산도 2012~2022년 61.3% 늘어 네덜란드 전체 증가율 46.8%를 웃돌았다. 스타트업이 활동하기 좋은 환경은 에인트호번을 혁신의 중심 도시로 만들었다. 자산가치가 10억 달러가 넘고 블랙록과 삼성전자 등이 앞다퉈 투자한 악셀레라AI를 비롯해 기업 3만여 곳이 이용하는 물류 소프트웨어 업체 센드클라우드, 광통신 딥테크 기업 이펙트포토닉스 등 첨단기술 기업들이 이 도시에 자리 잡았다.
이 같은 변화 뒤에는 지방정부와 기업·대학이 역할을 나눈 ‘트리플 헬릭스’가 있었다. 시는 규제와 공간을 열고 민간은 투자와 사업화를 맡았으며 대학은 기술과 인재를 공급했다. 스트레이프S에 주거·상업·문화시설이 함께 들어설 수 있도록 복합 용도를 허용하고 부지 전체를 ‘리빙랩’으로 개방해 스타트업이 신기술을 시험할 수 있도록 했다.
약 6년 전에는 교통·주거·산업경제·인프라 담당자 15명을 한 팀으로 묶어 부서 간 칸막이도 없앴다. 중앙역과 스트레이프S를 연결하는 고속버스 사업 준비 기간이 당초 6~7년에서 약 4년으로 줄어든 것도 이 조직이 기관 간 이견을 한자리에서 조정한 결과다. 프랑크 판 스볼 에인트호번시 중앙역지구 및 MIRT 프로그램 총괄 책임자는 “시가 모든 답을 갖고 있을 수는 없다”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기업과 대학이 함께 해법을 찾는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