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25일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 채소 코너. 상추 한 봉지를 집어 든 김 모(56) 씨는 가격표를 다시 확인하더니 장바구니에 넣지 않고 매대에 내려놓았다. 곁에 놓인 깻잎과 오이 가격까지 차례로 살펴본 그는 결국 가격이 싼 채소를 골랐다. 김 씨는 “며칠 전보다 비싸진 것 같아 사려던 양을 줄였다”며 “예전에는 고기를 먹을 때 쌈채소를 넉넉히 준비했지만 이제는 필요한 만큼만 사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관악구에 사는 신혼부부 박 모(29) 씨도 채소 가격 상승을 체감하고 있다. 평소 채소찜을 자주 해 먹는 그는 “배추가 생각보다 비싸 선뜻 장바구니에 담기 어려웠고 깻잎 대신 가격이 저렴한 깻순을 고른 적도 있다”고 전했다. 서울 중구에서 쌈밥집을 운영하는 이 모 씨는 ‘채소 값이 고기보다 비싸다’는 말까지 나왔던 지난해 상황이 반복될까 우려하고 있다. 이 씨는 “메뉴 가격은 쉽게 올릴 수 없고 쌈채소 양을 줄이면 손님들의 반응이 걱정된다”며 “납품가가 더 오르면 주문량이나 구매처를 조정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집중호우로 산지 수확과 출하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잎채소 가격이 며칠 새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비가 그친 뒤 폭염이 이어질 경우 생육 부진과 병해가 겹쳐 소비자와 외식업계의 부담이 더욱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7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이날 열무 상품 1㎏의 평균 소매가격은 3051원으로 20일 2464원보다 일주일 만에 23.8% 올랐다. 같은 기간 얼갈이배추는 19.4%, 적상추는 17.9%, 깻잎은 17.4%, 시금치는 15.5%, 미나리는 15.2% 상승했다. 브로콜리와 가시오이 가격도 각각 24.9%, 17.4% 뛰었다. 이들 품목은 23일을 전후해 가격이 크게 오른 뒤 27일까지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한동안 안정세를 보이던 잎채소 가격이 반등한 것은 집중호우 직후 산지 작업과 출하량이 줄어든 영향으로 분석된다. 상추는 충남 논산과 전북 익산, 경기 이천 등이 주요 출하지이며 열무와 깻잎도 수도권과 충청권을 중심으로 재배된다. 이 가운데 충남과 충북에는 이달 8~10일 호우 피해가 집중됐다. 당시 전국 농작물 침수 면적 401.5㏊ 가운데 두 지역의 피해 면적이 347.9㏊에 달했다.
상추와 깻잎·열무는 잎 자체가 상품인 데다 저장 기간도 짧다. 호우로 잎이 상하거나 수확 시기를 놓치면 출하 가능한 물량이 빠르게 줄어드는 작물이다. 침수 피해가 곧바로 소매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이유다.
문제는 비가 그친 뒤 이어지고 있는 폭염이다. 한 번 침수된 작물은 뿌리 기능이 약해져 고온에 노출되면 생육이 더욱 부진해질 수 있다. 고온다습한 환경에서는 작물이 물러 썩는 무름병 등 병해가 확산하기도 쉬워 수급 상황이 더욱 악화될 수 있어서다. 특히 풋고추와 애호박·토마토는 폭염이 길어질수록 꽃이 떨어지거나 열매가 갈라지는 현상이 발생해 수주 뒤 출하 차질로 이어질 수 있다.
대형마트의 한 농산물 바이어는 “오이와 파프리카는 단순히 수확이 늦어지는 수준을 넘어 일부 산지에서 과실의 품질이 떨어지고 열매가 제대로 맺히지 않아 유통 가능한 정상품 물량이 줄고 있다”며 “고온이 장기화하면 생육 부진과 병해충 피해로 다음 출하 물량까지 감소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유통 업계는 현재 가격 상승을 일부 품목의 단기적인 오름세로 보고 있지만 산지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폭염이 길어질 경우 다른 품목에서도 생육 부진과 병해 피해가 시차를 두고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업체들은 기상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 물량을 확보하고 특정 산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데 주력하고 있다.
유통 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가격이 올랐지만) 현재로서는 중장기적인 수급 불안 가능성이 크지 않다”면서도 “여러 산지에서 피해가 동시에 발생하면 대체 물량을 확보하는 데도 한계가 생길 수 있다”고 전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