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콘텐츠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투자금과 판권, 지식재산권(IP), 국제거래 등을 둘러싼 법적 분쟁도 확산하고 있다. 하나의 콘텐츠를 여러 투자사와 제작사, 유통사, 플랫폼이 공동으로 활용하는 구조가 일반화되면서 권리 귀속과 수익 배분, 계약 해제 이후의 정산 문제도 한층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26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민사20-3부(재판장 이의영)는 A회사가 콘텐츠 투자·배급사 쇼박스를 상대로 제기한 금전 청구 소송의 항소심 선고기일을 9월 2일 연다.
이 사건의 쟁점은 드라마 제작 프로젝트에 선지급된 투자금 50억 원을 돌려줘야 하는지다. 양측은 총 137억 원 규모의 투자계약을 체결했지만 A회사가 선지급금 50억 원을 제외한 나머지 투자금을 납입하지 못하면서 계약이 해제됐다.
A회사 측은 계약의 형식은 투자계약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펀드 조성 전 단계에서 이뤄진 ‘브리지 투자’에 해당한다며 선지급금 50억 원을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심은 투자금을 제대로 납입하지 않을 경우 계약을 해제하고 이미 지급한 금액을 반환하지 않도록 한 조항이 유효하다고 판단해 쇼박스의 손을 들어줬다.
콘텐츠 유통 단계에서 체결된 판권 계약을 둘러싼 소송도 이어지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은 최근 CJ ENM이 B제작사를 상대로 제기한 판권료 반환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선고했다. 해당 판결은 양측이 항소하지 않아 그대로 확정됐다.
이 사건에서는 영화 공급 계약이 무산된 뒤 선지급된 판권료를 어떻게 정산할지가 핵심 쟁점이었다. 재판부는 해당 금액이 영화 공급을 전제로 지급된 만큼 계약이 이행되지 않았다면 반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콘텐츠 제작에 해외 업체가 참여하는 사례가 늘면서 국제계약을 둘러싼 분쟁도 눈에 띈다. 국가 간 물품매매계약을 규율하는 국제물품매매계약에 관한 유엔협약(CISG)이 적용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홍콩의 한 금형업체는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사와 체결한 완구용 금형 제작 계약과 관련해 대금 지급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법원은 홍콩 업체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CISG에 따라 제품의 하자를 적시에 통지하지 않았다면 최종 승인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대금 지급을 거절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분쟁이 다양해진 배경에는 콘텐츠 산업의 외형 확대가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콘텐츠산업 동향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콘텐츠 산업 매출은 161조 4839억 원으로 2024년의 157조 4021억 원보다 2.6% 증가했다. 올해 1분기 매출도 40조 9495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7.9% 늘었다.
산업 규모가 커지면서 콘텐츠 계약도 단순한 제작·납품 계약에서 여러 당사자가 참여하는 투자·제작·유통·IP 사업 계약으로 확대되고 있다. 콘텐츠 기업들은 거래 과정에서 ‘계약과 협상의 복잡성’과 ‘권리관계 파악’ 등을 주요 애로사항으로 꼽고 있다.
곽재우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확산과 공동 제작 증가로 이용 매체와 지역, 기간, 공개 순서, 독점 여부 등을 계약 단계에서 더욱 세밀하게 규정할 필요성이 커졌다”며 “법률 자문도 완성된 계약서를 검토하는 수준을 넘어 권리 귀속과 투자금 회수 구조를 처음부터 설계하는 방향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법조계에서는 앞으로 콘텐츠 자체의 소유권보다 구체적인 활용 범위를 둘러싼 분쟁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인공지능(AI)을 이용한 연예인의 얼굴·음성 활용과 리메이크·스핀오프 제작, 게임·굿즈 등 2차 사업 권한이 대표적이다. 글로벌 OTT와 관련해서도 국가별 판권과 공개 기간·순서, 수익 정산 방식을 둘러싼 갈등이 주요 쟁점으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곽 변호사는 “분쟁을 줄이려면 누가 무엇을 소유하고 의사결정권을 행사하는지 계약서에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며 “현행 표준계약서가 최근 복잡해진 투자·IP 사업 구조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만큼 거래 유형별로 활용할 수 있는 모듈형 표준조항을 마련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조언했다.
이어 “법원도 업계 관행보다 계약서에 명시된 권리와 의무를 우선해 판단하는 만큼 계약 단계에서 합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문서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