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 에버랜드 옆에 위치한 삼성화재안내견학교. 새까만 털과 천진한 눈망울을 가진 두 살배기 안내견 ‘미소’가 꼬리를 살랑이며 인사를 건넸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까불까불해요. 함께 걸을 때는 진중한 모습이 반전이죠.” 호기심도 많고 친화력도 좋은 안내견 미소의 파트너인 유석종(45) 삼성화재안내견학교 프로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20년간 약 200명의 시각장애인에게 안내견을 연결한 공로로 ‘올해의 장애인상’을 수상한 유 프로를 만나 발자취를 들어봤다.
유 프로와 안내견의 인연은 2002년으로 거슬러 간다. 선천성 시각장애인인 그는 대학생 1학년 시절 안내견 ‘강토’를 만났다. 성인이 된 유 프로는 다소 위험이 따르더라도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기로 했다. 보호자로서 강토를 책임져 돌보고, 동반자로서 강토와 함께 캠퍼스를 거닐었다. 유 프로는 그때 비로소 진정한 성인이 되었다는 걸 실감했다.
“평생을 달리지 않는 개가 있습니다. 발을 밟혀도 짖지 않는 개가 있습니다. 강토와 함께라면 석종 씨에게 세상은 언제나 밝을 것입니다.” 2005년 강토와의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유 프로와 강토는 삼성화재의 TV 공익광고에 출연하게 됐다. 이들이 호흡을 맞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행’ 광고 메시지는 많은 시청자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
그 이듬해인 2006년, 유 프로는 안내견학교로부터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안내견 사업을 홍보하고 시각장애인과 안내견을 잇는 역할이었다. 유 프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직감했다. 안내견과 함께 삶의 선택권을 늘려간 그는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시각장애인 직원 1호’가 되었다.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지난 4월 유 프로는 약 200명의 시각장애인과 안내견을 연결한 공로로 ‘제30회 올해의 장애인상’을 수상했다. 안내견 공공장소 출입을 위한 법령 개정 등 이동권 보장을 위한 환경 조성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당초 장애인복지법은 안내견을 동반한 장애인이 공공장소 등에 출입하려 할 때 ‘정당한 사유’ 없이는 거부해선 안 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보조견의 출입을 거부할 수 있는 사유가 구체적이지 않아 실효성 논란이 일었다.
지난해 통과된 ‘조이법’(장애인복지법 개정안)은 감염 위험이나 위생 관리 등을 ‘정당한 사유’로 명확히 규정했다. 이에 따라 안내견들은 수술실, 조리장 등을 제외하곤 어디든 출입 가능하게 됐다.
“안내견은 시각장애인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가교’예요. 안내견과 함께하면서 더 깊은 책임감을 가지게 됐고, 더 많이 움직이게 됐고, 많은 사람을 만났어요.”
유 프로에 따르면 시각장애인에게는 외출 자체가 하나의 노동이다. 밖에 나가려면 번거로움이 뒤따른다. 택시를 이용하거나, 흰 지팡이를 짚거나,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대다수 시각장애인들이 꼭 필요할 때만 외출을 하는 이유다. 그런데 안내견이 곁에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안내견과 함께라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즐거워져요.” 그는 안내견을 ‘자율주행차’에 빗댔다. 시각장애인이 내비게이션이 되어 방향을 지시하면, 안내견은 자율주행차처럼 방해물을 피해 목적지로 향한다. 함께 소통하며 발을 맞춰 걷는 일. 별다른 이유 없이도 날이 좋아서 산책에 나서는 것. 안내견과의 동행이 주는 기쁨이다.
이처럼 안내견과 시각장애인은 팀플레이하는 파트너이자 가족이다. 안내견들은 파트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다 보니 외로움도 덜 느낀다. 밖에 나가서 걸을 때를 제외하고는 여느 반려견처럼 평안한 하루를 보낸다. 안내견학교에 따르면 은퇴 안내견의 평균 수명은 14세로, 일반 리트리버의 평균 수명보다 1~2년 길다.
삼성이 개를 기르는 이유는
우리나라 최초의 안내견은 1972년 임안수 대구대 교수가 해외서 데려온 셰퍼드종 ‘사라’였다. 그때만 해도 안내견을 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안내견에 대해 모르는 국민이 대다수였다. 1993년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의 결단 이후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해 ‘신경영’을 선언한 이 회장은 삼성화재안내견학교를 설립했다. 단일 기업이 운영하는 세계 최초이자 유일의 안내견학교였다.
설립 당시 “삼성이 왜 개를 키우냐”,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나 해라” 등 비판이 쏟아졌으나 삼성은 굴하지 않았다. 이 회장은 “ 삼성이 개를 길러 장애인들의 복지를 개선하거나 사람들의 심성을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이런 노력이 사회 전체로 퍼져나감으로써 우리 국민 전체의 의식이 한 수준 높아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회장의 혜안과 신념은 지난 30여 년간 시각장애인의 삶을 개선하고 사회 분위기를 바꾸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안내견은 그 나라의 장애인 복지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 중 하나다. 안내견이 환영받는 사회일수록 선진 복지국가로 평가된다. 유 프로는 “지난 20년간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조금씩 변해왔다”며 “안내견과 시각장애인이 걷는 모습이 일상적인 풍경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여전히 안내견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며 “안내견 이해 교육 및 홍보 프로그램이 사회 곳곳에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유 프로는 특히 요식업 종사자나 운수종사자를 대상으로 한 장애인 응대 교육의 필수성을 강조했다. 업장에서 안내견이나 장애인을 마주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래도 만에 하나 그들을 마주쳤을 때 ‘교육의 유무’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뀔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삼성화재안내견학교는 1994년 첫 번째 안내견 ‘바다’ 이래 매년 12~15두를 꾸준히 양성해왔다. 수많은 시각장애인과 안내견을 지켜봐 온 유 프로는 “그들이 자신만의 선택권을 가지고 일상을 영위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고 말했다. 안내견이 모두의 일상에 완전히 녹아들 때까지, 유 프로는 안내견과 사람을 잇는 ‘통로’로서 자리를 지킬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