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에 본사를 둔 국외 창업 기업 펜시브가 대학 시험 채점 AI를 개발해 올해 초 글로벌 톱 벤처캐피털(VC)인 메이필드로부터 투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메이필드가 점찍었다는 소문이 나면서 현재 다른 투자사들의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다.
16일(현지 시간)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양윤석 펜시브 대표는 2024년 UC버클리 졸업을 앞두고 창업을 결심했다고 했다. 양 대표는 “역사에 남을 만한 기업을 만들려면 가장 크고 어려운 미국 시장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양 대표의 초기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법인 설립 직후 현지 VC들이 시드 투자를 단행했다. 또 시리즈A 투자에는 세쿼이아캐피털과 앤드리슨호로위츠(a16z)의 스카우트펀드도 투자에 참여하며 후속 투자 유치 가능성을 높였다. 스카우트펀드는 대형 VC들이 정식 투자에 앞서 외부 투자자를 통해 소액 투자하는 일종의 탐색 투자 프로그램이다. 후속 투자에서 세쿼이아캐피털과 a16z가 정식 투자자로 참여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펜시브는 현재 100개가 넘는 대학, 1000명 이상의 교수에게 채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펜시브처럼 한인 창업자가 미국 등 해외에 설립한 스타트업, 이른바 ‘국외 창업 기업’의 현지 투자 유치 성공 사례는 최근 더 빠르게 늘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이끌며 한국 기업 존재감을 제고하면서 한인 창업자들이 설립한 인공지능(AI) 등 딥테크 스타트업에 대한 현지 관심이 더욱 커지는 모습이다.
영상 제작 AI 에이전트를 개발하는 ‘숨’의 임도현 대표는 올해 미국 법인을 설립한 뒤 현지 액셀러레이터 ‘파운더스’의 투자를 받았다. 임 대표는 “한국에서는 투자 제안을 받기까지 수년이 걸렸지만 미국에서는 학벌이나 이력보다 창업팀의 실행력을 보고 빠르게 결정했다”고 전했다. 숨은 여러 AI 영상 모델을 조합해 마케팅 영상을 제작하는 서비스를 선보였으며 조만간 한국에도 연구개발(R&D) 조직을 둘 계획이다.
개인용 AI 아바타를 개발하는 피클의 박채근 대표도 2025년 실리콘밸리로 건너와 창업했다. 피클은 세계적인 액셀러레이터 와이콤비네이터(YC) 등으로부터 총 450만 달러의 투자를 유치했다. 박 대표는 “사람들의 일상을 바꾸는 기술 기업을 만들려면 대규모 자본과 글로벌 확장 경험이 모여 있는 실리콘밸리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국내 창업보다 힘들지만 꼭 가야 할 길”이라고 설명했다.
일정 조율 AI 에이전트를 운영하는 ‘블록킷AI’의 공동 창업자 한윤석 개발총괄은 구글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창업에 뛰어들었다. 공동 창업자가 세쿼이아캐피털 투자자 출신으로 강력한 투자자 네트워크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 한 총괄은 “실리콘밸리는 인맥으로 움직이는 시장인 만큼 좋은 액셀러레이터나 VC의 투자를 받으면 후속 투자와 채용에서 강한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에 따르면 미국에서 새로 창업한 한국계 스타트업은 2022년 16곳 수준에서 2025년 연간 40곳 수준으로 늘어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창업자의 출신 대학과 국가보다 기술력과 글로벌 시장에서의 성장 가능성을 우선 평가하는 실리콘밸리의 투자 문화가 국외 창업을 촉진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국외 창업이 벤처 생태계의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으면서 이들 기업을 단순히 외국 기업으로 분류하는 시각에서 벗어나 정부 지원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벤처 업계에서 커지고 있다. 법인 소재지나 창업자의 국적보다는 글로벌 시장에서 거둔 성과가 국내 고용과 R&D, 후속 창업으로 얼마나 이어지는지를 기준 삼아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쌓아 올린 반도체 산업의 위상이 한국 딥테크 스타트업에 대한 글로벌 투자자들의 신뢰로 이어지는 만큼 이를 투자 유치와 해외시장 진출로 연결하기 위한 정책적 지원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광록 사제파트너스 대표는 “몰로코는 미국 기업이지만 해외에서 번 돈으로 한국의 우수한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며 “외화 유입과 일자리 창출뿐 아니라 글로벌 기업에서 경험을 쌓은 인재들이 다시 창업하면서 벤처 생태계 전체의 역량을 높이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국외 창업 기업을 판단하는 기준부터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창업자의 국적이나 법인이 어느 나라에 있는지만 따질 것이 아니라 해당 기업이 한국 경제에 어떤 가치를 만들어 내는지를 봐야 한다”며 “한국에서 인재를 채용하고 R&D를 수행하거나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을 돕는다면 정부 지원 대상에 포함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한국 스타트업을 바라보는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VC)의 시선이 달라지고 있는 점도 정부가 국외 창업 기업 지원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로 꼽힌다. 과거 현지 투자자들은 한국을 시장 규모가 작고 내수 의존도가 높은 국가로 인식했지만 최근에는 반도체와 AI, 제조 기술을 갖춘 딥테크 기업의 산실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서 한국투자파트너스USA 대표는 “미국 VC들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출신이 창업자로 참여하거나 이들 기업과 협력하는 스타트업에 관심이 매우 크다”며 “우리가 과거 구글과 메타 등 빅테크 출신 창업자를 높게 평가했던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세계 반도체 시장을 이끄는 기업들이 성장한 국가라는 사실 자체가 한국의 기술력과 인재 수준을 보여주는 ‘신뢰 자산’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서 대표는 “반도체와 데이터센터·에너지·바이오 등은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향후 10년 이상 성장이 이어질 산업”이라며 “한국은 우수한 기술 인력뿐 아니라 반도체와 배터리·자동차 등 탄탄한 제조 기반까지 갖추고 있어 현지 투자자들이 주목할 만한 조건을 갖췄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