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24일 일본 도호쿠 지방 이와테현 최대 도시 모리오카에서 차로 30분을 달리자 30도를 웃도는 햇볕 아래 파랗게 익어가는 벼가 끝없이 펼쳐졌다. 논과 보리밭 사이 도로에는 자동차만 오갈 뿐 사람의 흔적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인구 3만 3000명의 시와정(町)은 모리오카로 출퇴근하는 주민이 많은 베드타운이다. 인구로는 한국의 충북 보은군이나 전남 강진군과 비슷한 규모다.
마을 중심부에 들어서자 풍경이 달라졌다. 시와정 청사 뒤편에는 도서관과 농산물 직판장, 병원, 양육지원센터, 카페 등이 모인 ‘오갈(OGAL) 플라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평일 오전인데도 지역 농산물을 파는 ‘시와 마르쉐’에는 장바구니를 든 주민들이 줄을 섰다. 장을 본 주민들은 바로 옆 도서관으로 향했고 아이와 함께 소아과나 양육지원센터를 찾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차를 타고 도시 곳곳을 다니던 일상이 한곳에서 해결되는 생활권으로 바뀐 것이다.
불과 15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눈을 쌓아두는 공터였다. 시와정이 1990년대 말 인구 증가에 대비해 매입한 약 10만 ㎡ 부지는 개발 재원을 마련하지 못해 10년가량 방치됐다.
변화는 2009년 민간과 함께 오갈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시작됐다. 도서관과 시장, 병원, 체육시설, 행정 청사 등 주민들이 매일 찾는 시설을 반경 400m 안에 집중 배치했다. 공공시설만 짓는 데 그치지 않고 민간이 상업시설과 함께 기획·건설해 직접 운영하고 시는 필요한 공공시설을 매입하는 방식도 도입했다. 행정은 모든 사업을 직접 추진하기보다 민간이 지속적으로 수익을 내며 운영할 수 있도록 역할과 위험을 나눴다.
주민들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소비와 주거 수요도 늘어났다. 오갈 인근 57필지의 주택용지는 모두 분양됐고 지난 12년간 중심 시가지 공시지가는 3.3㎡당 12만 엔 수준에서 지난해 15만 8070엔으로 약 32% 상승했다. 구심점 없던 베드타운이 주민의 일상을 붙잡는 생활 도시로 바뀐 셈이다.
“사람들이 주말에도 떠나지 않기 시작했어요” 주민이 만든 공공성
“예전에는 주말만 되면 다들 모리오카로 나갔어요. 그런데 이제는 굳이 그럴 이유가 없죠.”
일본 이와테현 시와정(町)에서 탄산 온천 사우나와 애플사이다 양조장을 운영하는 호시 마키 씨는 지난 수년간 마을의 변화를 이같이 설명했다. 아이들이 뛰노는 광장 옆에는 도서관과 마트가 있고 조금만 걸으면 체육시설과 행정 청사가 나온다. 호시 씨는 “아이와 갈 곳도 있고 장도 볼 수 있어 시와정에서 머무는 시간이 확실히 길어졌다”고 말했다.
호시 씨 부부가 운영하는 사우나와 양조장은 과거 시와정 청사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2015년 네 곳에 흩어져 있던 행정 청사가 통합·이전하자 시와정은 빈 청사의 활용 방안을 민간에 열었다. 건축업을 하던 호시 씨 부부는 주민이 찾을 수 있는 사우나와 지역 사과를 활용한 양조장을 제안했다. 호시 씨는 “공공시설이었던 공간인 만큼 다양한 주민들이 다시 이용하는 곳이 됐으면 했다”며 “아르바이트생 14명도 전업주부와 학생·직장인 등으로 각자 원하는 시간대에 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와정의 민간 주도 개발 사업인 ‘오갈(OGAL) 프로젝트’에는 이처럼 ‘짓고 떠나는 개발’이 없다. 건물을 먼저 세운 뒤 이를 채울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 실제 공간을 쓰고 장기간 사업을 이어갈 사람이 설계 단계부터 참여했다. 건물을 완공하는 순간보다 문을 연 뒤 10년, 20년 동안 공간이 어떻게 굴러갈지를 먼저 따진 것이다.
설계도보다 먼저 정한 것은 ‘누가 운영할 것인가’
시와 도서관이 대표적이다. 현재 수석 사서로 일하는 데즈카 씨는 개관 이후 만들어진 공간을 넘겨받은 것이 아니다. 도서관이 문을 열기 전부터 시와정 공민연계실에서 기획에 참여했다. 어떤 책을 들일지뿐 아니라 주변 마켓과 어떤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고 주민을 어떻게 끌어들일지를 건물을 짓기 전부터 고민했다.
데즈카 씨는 “처음부터 어떤 도서관을 만들지, 주변 마켓과 어떻게 협업할지를 함께 고민했기 때문에 시와 도서관만의 정체성을 빠르게 실행할 수 있었다”며 “당시 30대 엄마와 함께 찾아오던 아이들이 이제 중고등학생이 됐다. 10년 동안 도서관도 주민들과 함께 성장했다”고 전했다.
건물을 짓는 구조도 바꿨다. 행정 기관이 도서관을 설계한 뒤 공사를 발주한 것이 아니라 민간이 도서관과 상업 시설이 들어선 오갈플라자를 먼저 기획·건설했다. 이후 시와정이 도서관 등 공공시설 부문만 다시 매입했다. 관청이 직접 추진했다면 약 10억 엔이 들 것으로 예상됐던 사업비가 약 8억 엔으로 줄었다. 민간은 상업 시설을 계속 운영해 수익을 내고 행정은 비용을 줄여 필요한 공공시설을 확보했다.
민원 따라 새로 만들어 기능 분산하는 대신 과감히 집중해야
오갈 프로젝트를 설계한 오카자키 마사노부 오갈주식회사 대표가 강조하는 ‘민간의 공공성’도 여기서 출발한다. 그는 “내 땅만 잘 개발한다고 가치가 오르는 것이 아니다”라며 “주변 지역 전체가 좋아져야 내 부동산 가치도 함께 올라간다”고 말했다. 건물 한 채를 지어 넘기고 떠나는 대신 주변에 사람이 계속 머물고 다시 찾아오도록 해야 사업도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도서관과 마트, 소아과, 체육시설, 행정 청사, 광장을 반경 400m 안에 모았다. 시설을 집중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공간이 따로 놀지 않도록 한 점이다. 도서관 이용객이 마켓을 찾고 체육시설을 이용한 가족이 광장과 상가에 머무는 식으로 시설이 서로 이용객을 끌어들이도록 했다.
행정도 장기간 사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관행을 바꿨다. 오카자키 대표는 민간과 소통하는 행정 창구를 하나로 통일하고 담당 공무원을 잦은 순환 보직으로 교체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단체장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투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토지도 20년 이상 빌릴 수 있는 장기 계약으로 묶었다. 프로젝트 출범 당시 계장이었던 가마다 센이치 씨는 현재 부군수가 된 뒤에도 오갈 사업을 관리하고 있다.
반발도 적지 않았다. 10년 넘게 방치됐던 부지에 생활 인프라가 몰리자 기존 주민과 상인들은 불만을 쏟아냈다. 사사키 다쿠마 시와정 지역즈쿠리과장은 사업 초기 2년 동안 주민·상인·농민·금융기관 등을 상대로 100차례 넘게 설명회와 의견 교환회를 열었다. 행정이 모든 요구를 직접 받아내는 대신 민간 조정 전문가를 중간에 두고 이해관계를 조율했다.
사람이 머물기 시작하자 주변의 가치도 움직였다. 오갈 인근에 조성된 주택용지 57필지는 모두 분양됐고 프로젝트 이후 12년 동안 중심 시가지 지가는 32% 올랐다. 오카자키 대표가 말한 ‘주변 지역 전체의 가치가 올라야 사업도 지속된다’는 구상이 수치로 나타난 셈이다.
오카자키 대표는 일본에서도 공민 연계 사업이 실패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했다. 행정이 지역 수요를 따지지 않은 채 건물의 규모와 용도를 먼저 정하고 운영 위험은 민간에 넘기는 경우다. 그는 “수요도 없는데 200실짜리 호텔을 지어 달라고 요구하는 곳도 있다. 그런 사업이라면 나도 하지 않는다”며 “민간과 함께하려면 행정도 책임과 권한·예산을 함께 나눠야 한다”고 지적했다.
오갈은 민간에 개발을 맡긴 것만으로 살아난 도시가 아니었다. 실제 공간을 쓸 사람을 설계부터 참여시키고 행정은 사업이 오래 이어질 계약과 조직을 만들었다. 건물을 지어놓고 떠난 뒤 누군가 채워주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눈을 쌓아두던 땅이 15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배경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