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김해에서 금형 업체를 운영 중인 A 씨는 최근 수십 년간 거래해온 고객사로부터 공문을 받고 시름에 빠졌다. 그는 현재 폐업까지 고민 중이다. A 씨는 “중국 제품이 30% 저렴한데 고객사가 납품 가격을 중국 제품 가격으로 맞추라고 한다”며 “전기료와 인건비 등 안 오른 것이 없는 상황에서 중국 제품 가격에 도저히 맞출 수 없다”고 토로했다.
14일 한국금형산업협동조합에 따르면 중국산 금형 수입액은 5년 만에 2.6배로 불어났다. 2020년 9792만 달러에서 지난해 2억 5724만 달러로 162.7% 증가했다. 2021년 1억 2036만 달러에서 2022년 1억 609만 달러로 줄었다가 2023년 1억 1960만 달러, 2024년 2억 277만 달러로 급증한 뒤 지난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중국 정부 지원을 바탕으로 인공지능(AI)·로봇 기반 스마트공장이 늘어나는 등 제조 혁신에 성공한 중국 금형 기업들이 가격과 질을 동시에 끌어올린 결과라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금형은 대표적인 뿌리 업종이다. 아직 중국산이 국내 금형을 전면 대체하는 단계는 아니지만 국내 업체의 수주 영역은 빠르게 좁아지고 있다. 인천 계양구에서 금형 업체 형일기술을 운영하는 최영환 대표는 “최근에는 일부 대형 금형 업체와 대기업이 가격을 낮추기 위해 금형의 기본 골격인 몰드베이스를 중국에서 제작하고 정밀도가 필요한 핵심부만 국내에서 가공하는 상황”이라며 “영세 업체는 수주 물량이 줄어 문을 닫거나 빚을 갚기 위해 공장을 계속 돌리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중국 제조업의 경쟁력 향상에는 중앙정부가 주도한 대규모 디지털 전환 정책이 자리 잡고 있다. 중국 공업정보화부 등 4개 부처는 ‘중소기업 디지털 역량 강화 특별 행동 방안’을 통해 2027년까지 약 100개 도시에서 4만 개 이상의 중소기업을 디지털화하고 규모 이상 중소 제조 기업의 핵심 공정 수치 제어율을 75%까지 높이기로 했다.
중국에 집적된 스마트 제조 역량은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의 글로벌 등대공장 현황에서도 확인된다. WEF가 올해 초 새로 선정한 23개 사업장 가운데 16개가 중국에 있다. 등대공장은 제조업 혁신을 선도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스마트공장을 일컫는다.
중국 금형 업종에서도 스마트공장 전환이 가시화하고 있다. 대표 사례가 금형 기업 둥관모더바오스마트테크다. 중국 관영 신화망에 따르면 이 회사는 AI와 산업 인터넷, 로봇 기술을 결합해 세계적 수준의 금형 제조 및 제품 사출 스마트공장을 구축했다. 중국은 개별 기업의 AI 전환(AX) 구축을 넘어 중소기업까지 활용할 수 있는 산업 생태계를 만드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올해 1월 발표한 ‘AI+ 제조업 특별 행동 실시의견’을 통해 2027년까지 제조업 전반에 적용 가능한 AI 대형 모델 3~5개를 개발해 벤치마킹 기업 1000개를 육성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바 있다.
반면 국내 뿌리산업은 외형 성장에도 미래 투자를 줄이고 있다. 국가뿌리산업진흥센터의 ‘2025년 뿌리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4년 뿌리기업의 매출액은 261조 5412억 원으로 전년보다 2.44% 증가했다. 하지만 영업이익은 12조 1676억 원에서 12조 1854억 원으로 약 0.15% 늘어나는 데 그쳤다. 연구개발(R&D) 투자액은 3조 2146억 원으로 오히려 8.9% 감소했다. 매출액 대비 R&D 투자 비중도 1.2%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AX는 언감생심이다.
일부 뿌리기업은 중국 제조업 공세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중국 기업을 좇아 중국 AI를 도입하기도 한다. 국내 한 AI 머신비전 솔루션 업체 대표는 “중국은 똑같은 장비를 200개씩 만들어놓고 물량 공세를 하고 있어 국내 업체보다 품질이 떨어지지만 거의 5배가량 저렴하다”며 “전체 규모로 봤을 때는 엄청 많지 않지만 차량 벤더 1·2차 회사들이 자재를 납품할 경우나 자동차 금속 부품을 생산할 때 중국 장비를 쓰는 것 같다”고 전했다.
국내시장에서 중국 제품의 경쟁력에 밀려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내 뿌리기업을 중국 기업이 인수하려는 움직임까지 포착된다. 인천 경서동 경인주물공단에 있는 B사는 올해 초 중국 주물 업체로부터 인수 제안을 받고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B사 대표는 “중국 업체가 미국의 대중국 규제를 피해 수출 거점을 확보하려 한 것으로 본다”며 “경영난이 심한 국내 뿌리기업으로서는 중국 업체의 인수 제안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