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는 것과 안 되는 것만이라도 알려줬으면 좋겠습니다. 희망고문식 제도 논의에 모든 블록체인 업체가 지쳐만 가고 있습니다.”
국내 블록체인 기업 대표 A 씨는 국내 디지털자산 산업 발전을 위해 가장 가장 시급한 과제를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당초 지난해 말 제정을 목표로 했던 디지털자산기본법이 1년 가까이 미뤄지면서 기업들은 기본적인 사업 계획조차 세우기 어려운 불확실성에 시달리고 있다는 호소다.
서울경제신문이 24일부터 29일까지 두나무와 빗썸 등 국내 가상화폐거래소와 커스터디, 인프라, 리서치 및 컨설팅, 게임과 대체불가토큰(NFT) 기업 등 32곳을 대상으로 긴급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 업체의 78.1%(25개사)가 디지털자산법 입법 지연이 ‘사업에 영향을 준다’고 밝혔다.
그동안 업계에 적용된 1단계 입법인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이 투자자 보호에 초점을 맞춘 법이라면 업계가 요구하는 2단계 입법인 디지털자산법은 발행과 유통, 사업자 인허가, 원화 스테이블코인 등 산업 전반의 제도적 기반을 담는 산업법이다. 업계는 산업을 뒷받침할 기본법 없이 사업을 지속하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입을 모았다.
블록체인 인프라 기술 기업 대표 B 씨는 “원화와 외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송금 인프라 구축을 준비하고 있지만 스테이블코인의 법적 지위와 발행·유통 규제, 가상자산사업자(VASP) 요건 등이 불분명해 해외 파트너와도 업무협약(MOU) 이상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 어렵다”며 “결국 관련 사업은 해외 자회사를 통해 추진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지갑 업체 대표 C 씨도 “디지털자산기본법 입법과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이 지연되면서 신기능 출시를 미루는 것은 물론 글로벌 경쟁사보다 시장을 선점할 기회까지 잃고 있다”고 토로했다.
특히 자본과 인력이 부족한 스타트업일수록 규제 불확실성이 치명적이라는 지적이다.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인력 채용과 기술 개발에 투자했다가 정책 방향이 바뀌면 사업 모델을 원점에서 다시 설계하거나 아예 접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업계는 토큰증권(STO) 사업자들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혁신금융서비스를 통해 10년 가까이 시장을 개척했던 초기 사업자들이 정작 제도화 과정에서 그간의 실증 경험을 인정받지 못한 채 과도한 인가 기준과 전통 금융권과의 경쟁을 거치면서 오히려 존폐 기로에 선 것이다. 실제 조각투자 혁신금융서비스 사업자 6곳 가운데 카사코리아와 펀블은 폐업했고 에이판다와 갤럭시아머니트리는 수년째 본서비스를 시작하지 못한 채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다. 루센트블록도 장외거래소 예비인가 불발 이후 사업 불확실성이 커졌다.
디지털자산기본법이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운 것은 산업 현실과 동떨어진 낡은 규제 체계라는 것이 업계의 지적이다. 명확한 산업법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가상화폐공개(ICO) 금지와 법인의 가상화폐 시장 참여 제한 1거래소 1은행 체계 등 법적 근거가 불분명한 행정지도와 포지티브 규제가 사실상 산업의 기준으로 작동하며 혁신을 제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블록체인 기업 대표 D 씨는 “2026년 한국 경제 현실에 맞지 않는 낡은 규제 체계 아래에서는 블록체인 기술이 가져올 변화에 전혀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며 “금융당국의 과도한 개입으로 산업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는 만큼 이제는 규제 철학 자체를 바꿔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인프라 업체 관계자 E 씨는 “법적 근거 없이 그림자 규제로 산업을 억눌러 국내 생태계가 크게 위축됐다”며 “제대로 된 입법과 함께 그동안 행정지도로 산업을 통제해온 과정에 대한 점검과 재발 방지 대책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규제 불확실성은 해외와의 격차를 더욱 벌리고 있다. 미국과 홍콩, 일본, 싱가포르 등 주요국은 스테이블코인과 토큰화 관련 제도를 잇달아 정비하며 글로벌 기업 유치 경쟁에 나섰지만 국내에서는 디지털자산기본법 논의가 장기화하면서 기업들이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실제 규제 불확실성을 피해 해외 법인을 설립하거나 추가 해외 진출을 검토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업계는 제도만 뒷받침된다면 국내 디지털자산 산업의 성장 잠재력은 충분하다고 입을 모은다. 신창선 오픈에셋 부사장은 “국내 디지털자산 산업의 경쟁력은 은행·핀테크·빅테크·거래소가 함께 성장하는 개방형 생태계를 얼마나 빠르게 구축하느냐에 달려 있다”며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기반으로 글로벌 디지털 금융의 새로운 표준을 선도할 잠재력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는 규제와 혁신을 대립적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실사용 중심의 제도와 시장을 함께 설계하는 민관 협력 모델로 전환해야 한다”며 “기업들이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제도 마련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