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희생 등 과거사 사건으로 사망한 국가폭력 사건 피해자의 배우자, 직계친족 또는 형제자매만 재심을 청구할 수 있도록 정한 형사소송법 조항이 헌법에 어긋난다고 결정했다.
헌법재판소는 24일 형사소송법 제424조 제4호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 3건을 병합해 해당 조항의 ‘과거사정리기본법 제2조 제1항 제3·4호에 규정된 사건’에 적용되는 부분에 대해 재판관 7대 2 의견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법불합치 결정이란 법률의 위헌성을 인정하면서도 법적 안정성을 위해 한시적으로 놔두는 것이다. 헌재는 내년 12월 31일까지 기존 조항의 효력을 인정했다.
사건의 청구인은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이후 사망한 고(故) 지학순 주교의 조카 등이다. 지 주교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대통령긴급조치 위반, 내란 선동,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 지 주교는 1993년 3월 사망했다.
이후 대통령긴급조치에 대한 대법원과 헌재의 위헌 판단이 나오자, 검찰은 형사소송법에 따라 재심을 청구했다. 다만 검사의 재심청구에는 긴급조치 위반 혐의에 관한 재심사유만 포함됐고, 내란 선동과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는 심리되지 않았다. 재심 법원은 긴급조치 위반 혐의에 대해서만 무죄를 인정했다.
지 주교는 천주교 성직자로 직계비속이 없고 직계존속도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이에 3촌 조카인 청구인이 나머지 혐의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려 했지만, 법원은 청구인이 형사소송법상 재심 청구권자가 아니라며 재심청구를 기각했다. 형사소송법 제424조 제4호는 유죄의 선고를 받은 자가 사망하거나 심신장애가 있는 경우 그 배우자, 직계친족 또는 형제자매만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고 정한다.
또 다른 사건의 청구인들은 1948년 여수·순천 사건(여순사건)에 연루돼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 법적 절차 없이 방첩부대·헌병대·경찰 등에 의하여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살해된 피해자들의 조카와 제수이다.
이들은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으나 재심 청구권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 역시 기각되자 직접 헌법소원을 냈다.
헌재는 청구인들과 같이 ‘한국전쟁 전후 시기 불법적으로 이뤄진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과거사정리기본법 2조 1항 3호), ‘권위주의 통치기 중대한 인권침해·조작의혹 사건’(같은 법 2조 1항 4호)에서도 직계친족 등에 대해서만 재심을 청구하도록 하는 것은 재판청구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일반 형사사건과 달리 “국가가 주체가 돼 조직적으로 불법행위가 이뤄졌을 뿐 아니라, 이후에도 오랜 기간 국가의 방해로 인해 재심청구 등 권리행사를 하는 것이 사실상 쉽지 않았다는 사정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피해자가 혼인도 하지 않은 채 사망하거나, 온 가족이 희생된 탓에 적법한 재심청구권자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이미 유족은 물론 그 배우자나 직계친족 등이 사망한 경우도 많다고 봤다. 헌재는 “국가가 판결이라는 형식을 빌려 국민에 대하여 불법행위를 저지른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에서까지 그 유죄의 확정판결을 유지해 달성하고자 하는 법적 안정성이, 재판청구권 보장의 필요성을 희생시킬 정도로 중대한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헌재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선고하면서 재심청구권자의 범위를 확장할 것인지, 범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과거사정리법이나 관련 특별법에 규정을 둘 것인지 등도 입법자의 재량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정형식·조한창 재판관은 “망인과의 관계를 고려해 재심청구권자를 한정한 것은 구체적 정의나 재판의 적정성과 법적 안정성을 조화시키고 사법자원의 효율적 활용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서 자의적 입법으로 보기 어렵다”는 반대의견을 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