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그 끈질긴 굴레를 떨쳐내기 위해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고뇌와 용기, 의지가 필요할까. 17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KBS교향악단 제827회 정기연주회 ‘운명과 열정’은 이 질문에 대한 음악적 답변과도 같았다. 이날 음악회는 서울경제신문 창간 66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는 지휘자 안드레스 오로스코-에스트라다가 지휘봉을 잡고, 2021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자 브루스 리우가 협연자로 나선 이날 공연은 운명을 극복하고 자유를 향해가는 인간의 의지를 한 편의 드라마처럼 웅장하게 그려냈다.
프로그램 구성부터 흥미로웠다.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5번’으로 이어지는 무대는 자유를 향한 투쟁과 인간 내면의 격정, 그리고 마침내 찾아오는 해방과 승리를 하나의 서사로 엮어냈다.
무대의 문을 연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은 16세기 네덜란드 독립운동의 영웅 에그몬트 백작의 투쟁을 그린 작품이다. 괴테의 비극을 바탕으로 한 음악은 어두운 서주에서 시작해 승리를 알리는 찬란한 종결부로 나아간다. 오로스코-에스트라다는 무겁고 긴장감 넘치는 초반부를 단단하게 쌓아 올린 뒤 후반부로 갈수록 에그몬트의 불굴의 의지를 생생하게 드러냈다. 특히 피콜로가 연주되는 마지막 부분에서는 자유를 되찾은 환희를 경쾌하면서도 위엄 있게 그려냈다.
이어진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에서는 브루스 리우의 개성이 빛났다. 그는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 리사이틀과 협연 무대를 가졌지만 차이콥스키의 대표적인 피아노 협주곡은 국내에서 처음 선보였다. 이날 리우는 특유의 유연한 터치와 투명한 음색, 그리고 순간의 영감에 몸을 맡기는 듯한 자유로운 호흡으로 자신만의 차이콥스키를 들려줬다.
여유 있는 표정으로 무대에 등장한 그는 첫 악장부터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패시지와 폭발적인 에너지로 객석을 압도했다. 그러나 정작 그의 강점은 화려함이 아니었다. 서정적인 선율에서는 한 음 한 음을 노래하듯 들려줬고, 오케스트라와의 대화에서도 자연스러운 호흡을 이어갔다. 특히 2악장에서는 여린 음들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서정을 극대화했다. 3악장에서는 무서운 집중력과 아찔한 속주로 에너지를 폭발시켰다. 완벽한 통제와 즉흥성 사이를 오가는 그의 연주는 살아 있는 음악의 매력을 보여줬다.
2부의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5번은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 흔히 ‘운명 교향곡’으로 불리는 이 작품은 차이콥스키가 자신의 내면적 갈등과 삶의 고뇌를 음악으로 승화시킨 걸작이다.
1악장은 클라리넷이 제시하는 음울한 선율로 시작했다. 짧은 음 서너 개로 이뤄진 ‘운명의 동기’는 마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다. 다양하게 변주되며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이 동기는 삶의 굽이굽이마다 어른거리는 운명의 그림자를 상징한다. 오로스코-에스트라다는 이 동기가 등장할 때마다 긴장감과 방향성을 부여하며 거대한 서사의 중심축으로 만들었다.
2악장의 백미는 단연 호른 독주였다. 이날 객원 수석을 맡은 김홍박 서울대 음대 교수는 깊고 따뜻한 음색으로 차이콥스키 특유의 러시아적 서정을 그려냈다. 오슬로필하모닉오케스트라 호른 수석을 지낸 세계적인 호르니스트답게 호른 선율에는 깊은 고독감이 스며있지만 동시에 인간적인 위로와 온기를 건넨다. 호른의 노래가 객석을 감싸자 오케스트라는 이를 섬세하게 받쳐주며 한 편의 서정시 같은 순간을 만들어냈다.
3악장은 우아한 왈츠가 펼쳐졌다. 지휘자의 경쾌한 손짓에 맞춰 현악기들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짧은 음형들을 정교하게 엮어냈다. 특히 제1바이올린과 비올라가 경쾌하게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선율을 빚어냈다.
마지막 악장에서 운명의 동기는 더욱 강렬한 모습으로 돌아왔고, 오케스트라는 이를 밀도 높은 에너지로 밀어붙였다. 오로스코-에스트라다는 마침내 종결부에서는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와 승리에 도달하는 듯한 해방감을 선사했다. 3개의 악장을 거치면서 쌓아 올린 서사를 폭발적으로 분출시키는 후반부에서는, 마치 단원들에게 에너지를 불어 넣는 듯한 지휘를 선보였다.
1977년생인 그는 빈 심포니커 음악감독과 휴스턴심포니 음악감독을 지내며 국제 무대에서 입지를 다져왔다. 지난해 KBS교향악단과 함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돈 후안’과 ‘장미의 기사 모음곡’을 선보이며 국내 클래식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그는 이번 무대에서도 특유의 에너지와 집중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의 지휘는 직관적이면서도 명확했다. 동작 하나하나에 음악적 의도를 담아 열성적으로 표현했고, 오케스트라는 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열정적인 몸짓과 눈빛으로 단원들을 이끌며 약 2시간에 달하는 숨 막히는 드라마를 완성했다.
이날 공연에는 김홍박 교수 외에도 정상급 연주자들이 객원으로 함께하며 무대의 완성도를 높였다. 덴마크국립방송교향악단 악장 홍수진이 객원 악장으로, 전 KBS교향악단 플루트 수석 안명주 부산대 교수와 전 도쿄필하모닉오케스트라 클라리넷 수석 조성호 강원대 교수가 참여했다.
KBS교향악단은 같은 프로그램으로 18일 오후 8시 롯데콘서트홀에서 한 차례 추가 공연을 갖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