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전력 수요를 책임질 신규 대형 원전 2기가 지어질 부지로 경북 영덕군이 낙점됐다. 2017년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백지화됐던 ‘천지’ 원전 부지가 9년 만에 재가동되는 것이다. 국내 최초 소형모듈원전(SMR) 1기는 부산 기장군에서 첫 선을 보이기로 했다. 대형 원전 2기는 각각 2037년·2038년에, SMR은 2035년 상업운전을 시작할 예정이다.
17일 기후에너지환경부에 따르면 신규 원전 건설 부지평가위원회는 전체회의를 열고 이와 같이 신규 원전 예비 후보지를 최종 확정했다. 우리나라에서 신규 원전 부지가 결정되는 것은 건설 중인 원전 기준으로 신한울 원전 1~4호기 이후 이번이 24년 만에 처음이다. 후보지 공모에 참여했던 울산 울주군과 경북 경주시는 고배를 마셨다.
신규 대형 원전 2기는 모두 설비용량 1.4GW(기가와트)의 한국형 원전인 ‘APR-1400’으로 지어질 예정이다. APR-1400은 원자로와 증기발생기 등 핵심 기자재를 모두 국산화한 것이 특징이다. 2000년대 이후 국내에 지어지는 원전과 아랍에미리트(UAE)에 수출한 바라카 원전 1~4호기 등이 모두 APR-1400을 채택했다. 원전 2기 합산 2.8GW는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전력 수요와 맞먹는 용량이다.
국내 처음으로 SMR 건설 계획도 구체화됐다. 이번에 지어질 SMR은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이 2020년부터 개발해 최근 원자력안전위원회에 표준설계 인가를 신청한 혁신형 SMR(i-SMR) 모델이다. i-SMR은 대형 원전에 주로 사용하고 있는 가압경수로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되 규모를 축소하고 주요 설비를 일체화했다. 170㎿(메가와트) 규모의 SMR 원자로 4개가 1개의 모듈에 모여 있는 형태로 총 설비용량은 약 700㎿ 수준이다. 정부는 원안위가 설계 인가를 내는 대로 공사에 돌입해 2035년까지 가동 준비를 마칠 방침이다.
신규 대형 원전 2기와 SMR 후보지가 확정되면서 폭증하는 전력수요에 대응한 공급 안전판이 마련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윤석열 정부 때 초안이 마련된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대형 원전 3기 신규 건설을 제시했으나 이후 국회 논의 과정 등에서 2기 추가 건설로 전체 원전 공급 계획이 줄어든 바 있다. 이마저도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면서 신규 원전 건설 계획 자체가 재검토되는 위기를 겪었으나 공론화 과정을 거쳐 원안대로 추진하기로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전문가들은 2050년 탄소 중립과 안정적 전력 공급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원전을 더 지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한국원자력학회와 한국신·재생에너지학회, 대한전기학회는 최근 공동 정책 제언에서 “올해 마련되는 12차 전기본에 대형 원전 신규 건설 계획을 최대 4기 더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에 부지가 확정된 대형 원전은 2038년께 공사가 끝나는데 그 뒤로 2039~2040년에 대형 원전 4기가 더 가동되도록 지금부터 준비하자는 이야기다.
영덕군이 울주군을 제치고 선정된 것은 이미 한 차례 원전 부지로 선정된 적 있는 경쟁력 있는 입지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영덕군이 제시한 영덕읍 석리·노물리·매정리 및 축산면 경정리 일대는 2000년대 초 부지가 확정됐다 2017년 문재인 정권의 탈원전 정책으로 개발이 좌초됐던 천지 원전 부지다. 총면적은 324만 ㎡로 한수원이 공모에 필요하다고 명시한 면적인 104.1만 ㎡의 3배에 달한다. 당초 부지로 선정됐을 당시 최대 6기의 원전을 건설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공간을 확보한 결과다.
업계 관계자는 “인공지능(AI) 전력수요를 고려하면 앞으로 신규 대형 원전을 더 짓는 것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며 “기존 원전들에 잔여 부지가 거의 없어 충분한 공간을 확보한 영덕군이 경쟁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실제 영덕군은 △부지 적정성 △환경성 △건설적합성 △주민수용성 등 4개 평가 분야 모두에서 울주군을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부지 적정성 부문 점수는 울주군보다 4.11점 앞섰는데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86% 이상이 원전 유치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던 영덕군민의 뜨거운 유치 열기가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부지가 이미 확보돼 있고 여유 공간도 풍부했던 덕에 부지 적정성과 건설적합성도 울주군에 비해 각각 1.6점, 1.07점 높았다.
신규 원전 공사는 앞으로 속도를 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수원은 대형 원전 건설 기간으로 13년 11개월을 제시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더 긴 시간이 소요된 경우가 많다. 당장 올해와 내년 준공을 앞두고 있는 새울 3·4호기의 경우 부지 선정부터 준공까지 각각 24년, 25년이 걸렸다. 지역 주민을 설득하는 데 수년을 소요한 데다 문재인 정권의 탈원전 정책으로 사업이 10년 가까이 좌초한 탓이다.
이번에는 사정이 다르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우선 부지 선정 단계부터 지자체가 주민 동의를 받은 뒤 직접 신청하는 공모 방식을 택했다. 부지 확정 뒤 2~3년 걸리던 주민 설득 작업을 공모 단계에서 마무리하는 셈이다. 정부 정책 역시 AI 시대에 급증하는 전력수요를 원전과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대응하겠다는 기조여서 인허가 작업도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부지 확정이 임박하면서 업계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원전 생태계가 유지되려면 해외 수출 물량과 무관하게 국내에서 최소한 동시에 1개 이상의 원전이 건설 중이어야 한다”며 “일단 2038년까지는 먹거리가 확보된 셈”이라고 설명했다. 기존 건설 중인 원전만 보면 2032~2033년 신한울 3·4호기 준공 이후 일감이 끊길 위기였는데 숨통이 트였다는 이야기다.
부산 기장군이 SMR 건설 후보지로 선정된 것도 지역 주민 여론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기장군과 경주시의 총점 차는 2.55점에 불과했는데 그중 1.88점을 ‘주민 수용성’ 영역에서 벌였다. 기장군 고리 원전은 1호기가 영구 폐쇄된 데다 노후한 2~4호기의 예방 정비가 잦았던 탓에 발전량이 갈수록 줄고 있었다. 한수원이 원전 소재지에 제공하는 법정 지원금은 발전량에 연동돼 있는 터라 지역사회의 위기감이 상당했다.
뿐만아니라 기장군은 고리 원전이 있는 국내 원전 산업의 핵심 거점이다. 원전 운영 경험과 관련 인프라, 송전망 기반이 축적돼 있어 국내 첫 SMR을 기존 원전 체계와 연계해 추진하기에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고리 1호기 원전이 영구 폐쇄 절차에 돌입한 터라 송배전 시설의 여유가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작용했다.
정부 주도 SMR 건설 계획이 구체화된다는 점 역시 의미심장하다. 그동안 연구개발(R&D) 단계에 머물던 ‘한국형 SMR’을 현실에 만들기 위한 첫발을 내디딘 셈이어서다. 세계 각국은 SMR 개발을 시도하고 있지만 중국을 제외하면 대부분 민간 업체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어 사업 발표와 철수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반면 i-SMR은 정부 주도로 기술을 개발해 건설하게 되므로 사업이 안정적으로 추진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국제 에너지기구(IEA)는 전 세계 SMR 설비용량이 2050년께 최대 120GW(기가와트)에 달하고 누적 투자 규모는 약 6700억 달러(약 1013조 원)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