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이 사실상 종전에 합의하면서 국제유가가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국내 유가와 물가가 전쟁 이전 수준으로 안정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국제유가가 국내에 반영되기까지 시차가 있는 데다 고환율 부담이 지속되고 있어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물가 하락은 당분간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다.
15일 국제유가는 미국과 이란의 종전 양해각서(MOU) 서명 기대가 반영되며 빠르게 안정되는 흐름을 보였다. 이달 초까지만 해도 배럴당 90달러를 웃돌던 브렌트유는 호르무즈해협 재개방 가능성이 커지자 이날 84달러까지 내려왔다. 중동 전쟁 발발 직후인 올해 3월 초 120달러에 육박한 것과 비교하면 40달러 가까이 낮아졌다. 두바이유와 서부텍사스산원유(WTI)도 80달러 안팎 수준으로 내려오며 중동 리스크 프리미엄이 상당 부분 해소됐다는 평가다.
다만 국제유가가 전쟁 이전인 배럴당 70달러 수준으로 돌아가기에는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은 최근 ‘호르무즈해협 봉쇄 장기화에 따른 국제유가·천연가스 도입 가격 전망’ 보고서에서 호르무즈해협 봉쇄가 해제되더라도 유가는 당분간 높은 수준을 유지하다가 점진적으로 안정될 것으로 전망했다.
구체적으로 이달 말 봉쇄가 종료된다고 하더라도 설비 재가동과 대기 물량 출회, 기뢰 제거 등 공급 지연 요인이 남아 8월부터 정상 통항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종전 합의가 국제유가의 상단을 낮추는 요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실제 공급 정상화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다. 연구원은 국내 액화천연가스(LNG) 도입 가격 역시 올해 10월 고점을 찍은 뒤 연말에 들어서야 안정화 국면에 진입할 것으로 내다봤다.
공급망 정상화에도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호르무즈해협 통항이 재개되더라도 선박 운항 일정 정상화와 재고 재축적, 산유국 생산시설 복구 등이 순차적으로 이뤄져야 해 공급망이 완전히 회복되기까지는 60~90일이 소요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제유가가 전쟁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가기까지 몇 개월이 걸릴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국내 유가는 이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이는 국내 유가 결정의 구조적 특징인 시차 요인 때문이다. 원유 도입 이후 해상운송 기간, 정유사의 정제 및 유통 기간, 재고 소진 주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국제유가가 국내 유가에 반영되기까지는 통상 2~3주가 걸린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미래에너지융합학과 교수는 “유가가 100달러대에서 80달러대로 내려온 만큼 단기 급등세는 진정됐지만 전쟁 발발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중동의 석유 생산설비가 공격으로 상당 부분 파손됐고 공격을 받지 않은 유전도 생산을 중단한 기간이 있어 재가동까지 수개월이 걸릴 수 있다”며 “전쟁 이전 수준으로 완전히 정상화되려면 1년에서 길게는 3년까지도 걸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물가 안정까지도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유가 상승분은 원재료와 물류비·생산비 등을 거쳐 소비자가격에 반영되는데 이미 누적된 비용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 물가 충격은 이미 기업 현장에 상당 부분 반영된 상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4월 생산자물가지수는 전월 대비 2.5% 상승하며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2월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지난해 9월 이후 8개월 연속 상승세다. 특히 석유·석탄 제품값은 한 달 새 31.9% 급등하며 생산자물가 상승을 주도했다.
원재료 가격 상승세는 더욱 가팔랐다. 수입품을 포함한 국내공급물가지수는 4월 기준 전월 대비 5.2% 상승했고 원재료 가격 상승률은 28%를 웃돌았다. 생산자물가는 통상 1~3개월가량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에 반영되는 만큼 최근의 원가 충격이 하반기 장바구니 물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미 올해 5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3.1% 뛰면서 2년 2개월 만에 3%대에 진입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유가가 안정되더라도 국내 물가에는 시차를 두고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며 “특히 고환율 때문에 식재료를 비롯한 수입물가 부담은 피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나라는 식재료 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만큼 환율이 높은 수준에 머물면 체감물가가 쉽게 내려가기 어렵다”며 “여기에 여름철 폭우나 가뭄 등으로 작황이 나빠질 경우 신선식품 가격이 여름부터 추석 전까지 다시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